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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주의

by 고석근

허무주의


니힐리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최고의 가치들이 자신의 가치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이에) 목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힘에의 의지>에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이렇게 살다가 죽는 거잖아.’


우리의 육체는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게 된다. 이 얼마나 두렵고 허무한 일인가?


니체는 이 시대의 하늘에는 허무주의(니힐리즘)의 검은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다고 본다.


그는 말한다. “이 시대에는 최고의 가치들이 사라져 더 이상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존재하는 않는다.”


신이 죽은 시대에는 ‘육체’만이 달랑 남는다. 신이 있던 자리에 육체가 자리를 잡고 있다.


‘몸짱’이라는 말이 이 시대를 대변해 준다. 우리는 몸을 가꾸고 치장하는 데 온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런데 이 육체는 곧 사라지지 않는가? 여기에 허무주의의 근원이 있다. 하지만 과연 인간은 육체로만 이루어져 있는가?


우리의 이 육체는 분명히 실재하는 물질로 보이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면 육체는 우리가 먹은 음식들로 이루어져 있고 계속 새로운 음식들로 재구성된다.


몇 달 전의 나의 육체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없다. 단지 육체에 대한 나의 기억이 있을 뿐이다.


이 기억에 의해 우리는 ‘나’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미 무수히 죽고 무수히 다시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통일체, 이것이 나라는 존재의 실상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허무해진다.


육체라는 물질에 오랫동안 집착한 결과다. 우리는 물질(육체)에 대한 집착을 끊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죽을 때 누구나 육체에 대한 집착을 끊게 된다. 며칠 전에 지구 반대편에서는 큰 지진이 일어났다고 한다.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고 한다. 이 기도할 때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 될까?


육체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게 된다. 육체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 상태, 황홀하게 된다.


이 상태는 명상을 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 상태를 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한다.


우리의 육체인 색(色)은 곧 공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현대양자물리학에서도 같은 말을 한다.


우리의 육체는 곧 에너지장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을 고요히 하여 육체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게 되면, 우리 자신이 에너지장이라는 것을 확연히 깨달을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요가에서 말하는 깊은 마음의 경지, 지혜층을 넘어 희열층으로 들어가고 진짜 나, 자기(참나)를 만나게 된다고 한다.


누구나 죽을 때는 지혜층, 희열층으로 들어가고 참나를 만나게 된다고 한다. 티벳의 ‘사자의 서’는 죽어가는 사람을 위한 책이다.


사람이 죽을 때 티벳의 승려가 곁에서 사자의 서를 낭송해 준다고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망자가 육체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게 되면, 환한 빛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이때 망자가 만나는 것이 공의 세계일 것이다. 이 ‘텅 빈 충만’이 우리의 실체라는 것을 살아있는 동안 알게 된다면, 우리는 아주 멋진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물질은 감각의 지각에 불과하다.” 우리 육체는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양자물리학에서도 “물질은 파동이 낮은 에너지가 감각으로 지각된 것”이라고 말한다.


공자는 죽음에 대해 질문하는 제자에게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느냐?”고 되물었다.


그렇다. 우리는 충분히 살아야 한다. 육체로만 살지 말고 에너지로도 살아야 한다. 현대인들이 마약을 하는 것은 바로 육체를 넘어서는 삶에 대한 소망일 것이다.


마약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공부를 통해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다. 니체는 허무주의를 온몸으로 껴안으면 허무주의가 극복될 수 있다고 말한다.


니체는 마냥 즐거운 아이를 상상했을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는 아이. 항상 현재에 빛나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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