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자신이 되어라!
대중에 속하려고 하지 않는 인간은 안락함을 단념할 필요가 있다. 그는 ‘네 자신이 되어라! 네가 지금 행하고 생각하고 욕망하는 모든 것이 네가 아니다’라고 부르는 자신의 양심에 따른다.
- 니체, <반시대적 고찰>
악몽을 꾸었다. 시골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가고 있는데, 핸드폰이 없다. 다시 되돌아가보니 다들 빈집들뿐이다.
빈집 앞에서 망연자실 서 있다 깨어난다. ‘휴, 다행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 꿈에서 깨어난 걸까?
남미의 대문호 보르헤스의 소설 ‘원형의 폐허들’에는 꿈속에서 인간을 창조하려는 한 도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늪지 속의 폐허가 된 신전에 어느 날 한 도인이 배를 타고 온다. 그는 꿈을 통해서 살과 피를 가진 살아 있는 자식들을 낳고 싶어 했다.
꿈속에서의 현실은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꿈속의 인물들은 자신들이 누군가의 꿈속에 있다는 것을 모른다.
어느 날, 신전에 불이 났다. 도인은 불 속에 갇혀버렸다. 그는 불 속에서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알고는 경악한다.
도인 역시 누군가의 꿈속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보르헤스는 “우리가 경험하고 기억하는 현실은 누군가의 꿈”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 현실이 누군가의 꿈속이라니! 그렇다. 우리는 ‘언어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사물들, 그것들은 실제 사물이 아니다. 언어다. 우리는 길이라는 언어, 버스라는 언어, 사람들이라는 언어를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라는 것들은 다 언어다. 다른 사람이 만든 언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말한다. “네가 지금 행하고 생각하고 욕망하는 모든 것이 네가 아니다.” 그는 이 환영 속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대중에 속하려고 하지 않는 인간’이 되라고 말한다. 남들의 언어로 살아가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남들의 언어로 살아가는 이유는 ‘안락한 삶’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미 정해진 매뉴얼대로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편안한가!
하지만 세상은 매뉴얼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세상은 언제나 무한히 변화생성하고 있는 것이다.
생성변화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면, 우리는 자신의 ‘양심(良心)’의 소리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양심은 우리가 타고날 때 갖고 있는 본래의 마음이다. 천지자연과 하나인 마음이다. 이 마음으로 살아가면, 우리는 천지자연과 하나가 된다.
양심은 언어의 안개에 가려진 세상을 넘어 이 세상의 실상을 보게 한다. 척 보면 아는 통찰력, 신통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실상은 언어도단(言語道斷), 언어가 끊어진 자리에서 말갛게 드러난다. 그 세계는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로는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비가 내린다’는 말을 쓴다. 하지만 비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비라는 언어가 있어 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한 물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 높은 온도에 의해 수증기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 되었다가 땅으로 내리는 것을 우리는 비라고 부른다.
비는 여러 원인과 조건들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비라고 이름을 붙이니까,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듯한 착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저 산도, 물도, 나무도 다 어떤 원인과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모두 다 이름에 불과하다.
그래서 노자는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라고 했다. 어떤 것에 이름을 붙이면 그것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이 언어 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 있다.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 시(詩)를 사용하여 살아가면 된다.
시는 우리의 양심이 말하는 언어다. 언어이면서 언어를 넘어선다. 어떤 한순간의 언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번개가 사물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듯, 시에 의해 삼라만상은 자신의 실재를 드러낸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시인 옥타비오 파스는 ‘시’를 노래한다.
‘멋진 수탉처럼,/목을 비틀어버려, 요리사처럼,/털을 꺼내버려, 투우처럼,/수소처럼, 질질 끌고 가라,/가르쳐준 대로 해, 시인아,/말들을 서로 삼켜버리게 해라.’
말들이 서로 삼켜버린 자리에서 피어나는 언어가 시다. 찰나가 영원인 순간이 드러난다. 이때 우리는 온전히 다른 사람과 다른 사물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