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회귀
생성에 존재의 성격을 각인하는 것─ 이것이 힘에의 의지의 최고 형태이다. 모든 것이 회귀한다는 것은 존재의 세계에 생성의 세계가 극한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 니체, <힘에의 의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노래방에 갔다. 어머니는 힘없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셨다.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난다-”
우리는 숙연히 듣고 있었다. 정말 인생이란 얼마나 슬픈 것인가! 이 세상에 정을 남겨두고 몸만 어디론가 가야 하다니!
어머니의 일생은 무거움의 연속이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보릿고개는 이 땅에 태어난 여인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을 지웠다.
인간에게 시간은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 시간은 아무리 힘들었던 것도, 아무리 좋았던 것도, 깨끗하게 씻어낸다.
프랑스의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말했다. “이 무한한 우주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우리는 시간, 공간적으로 무한한 우주 앞에서 엄청난 두려움을 느낀다. 원시인들도 그랬을까?
아마 우리만큼 우주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문자가 없었기에 ‘역사’에 대한 개념이 없었을 것이다.
엄청나게 오래된 태초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경험한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가 가장 오래된 시간이었을 것이다.
어디서 읽은 글이다. 아침에 잠을 깬 아이가 중얼거리더란다. “왜 아침이 계속 오는 거야?”
그 아이는 유치원에 가는 게 싫었나 보다. 그 아이에게 시간은 영원회귀다. 모든 것은 되풀이된다.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로 흘러가는 장구한 시간은 긴 시간의 사건들을 기록한 문자가 있어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직선의 시간’은 우리의 상상력의 산물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온몸으로 경험하는 것은 영원회귀의 시간이다. 머리로 시간이 흘러간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온몸의 감각을 다 열었을 때 경험하는 시간은 영원회귀다. 아이와 원시인과 동물들이 느끼는 시간이다.
생생한 삶 그 자체다. 오롯이 현재만 빛나는 시간이다. 그래서 아이들과 동물들은 참으로 행복해 보인다.
공부모임에서 한 회원이 공연에 다녀 온 얘기를 했다. “한 행위 예술가가 바디페인팅한 나신으로 두어 시간 동안 행위예술을 했어요.”
그 행위예술가는 어떤 시간을 체험했을까? 그는 시간이 흘러간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로지 몸의 폭발하는 율동만 있었을 것이다. 우주의 리듬과 하나가 된 몸. 바로 ‘찰나가 영원’인 상태다.
그래서 니체는 우리에게 “어린 아이와 예술가가 유희하듯이 천진무구하게 살아가라!”고 말한다.
이때 우리는 “생성에 존재의 성격을 각인하게 되고, 힘에의 의지가 최고의 형태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어머니께서는 우리가 어릴 적에 항상 혼잣말을 하셨다. “너희들만 다 키우면 훨훨 날아갈 거다!”
어머니의 마음은 항상 미래에 사셨다. ‘너희들만 다 키우면’ 하지만 우리가 다 크고 나자 어머니는 걸어 다니는 것도 힘들어 하셨다.
직선의 시간은 우리에게 항상 희망 고문을 한다. 우리는 이 시간의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니체는 “지금 여기에서 맞이하는 모든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운명애(運命愛), 아모르파티(Amor fati)다.
아이와 예술가가 오롯이 현재에 몰입하듯이, 우리도 ‘지금 여기’에 온 마음을 다하여 살아가라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모든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무한이 된 우리는 파스칼처럼 무한한 우주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