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요한 것은 영원히 생생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영원히 길게 산다는 것’은 물론이고 일반적으로 단순히 살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나는 참으로 무겁게 살았다. 20세 초반까지는 ‘장남’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다.
대학교 2학년 때, ‘철학자의 꿈’을 갖게 되면서 ‘학자’라는 무거운 짐을 지기 시작했다.
대학원에 진학해 철학을 공부하여 ‘이상사회(理想社會)’라는 불후의 명저를 쓸 계획을 세웠다.
그러다 30대 중반이 되면서, 모든 짐을 내려놓았다. 문학을 공부하며 ‘가벼운 삶’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꿈에는 나비가 되고 깨어나서는 인간이 되는 장자, 두 세계를 넘나들며 살아가는 장자가 나의 목표가 되었다.
인간은 육체를 가진 물질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기(氣), 에너지장의 존재다. 육체는 생로병사를 겪지만, 에너지는 영원하다.
이 두 삶을 동시에 살아야 하는 인간, 일생은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를 오가는 시소 타기가 된다.
이 사이의 길을 가는 법을 불교에서는 중도(中道)라고 한다. 중(中)은 무거움과 가벼움을 다 포함하는 가장 알맞은 자리다.
나비와 인간, 그 사이에서 살아가는 방법이다. 어떨 땐 나비가 되었다가 어떨 땐 나비와 인간의 혼합 생명체가 되었다가 어떨 땐 인간이 되어야 한다.
삼라만상이 항상 변화 생성하듯이, 인간도 무한히 변화 생성할 수 있어야 한다. 변화를 두려워하면 죽음이 온다.
체코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카레닌이 개가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틀림없이 테레사에게 오래전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봐, 매일같이 입에 크루아상을 물고 다니는 게 이제 재미없어. 뭔가 다른 것을 찾아줄 수 있겠어?” 이 말에는 인간에 대한 모든 심판이 담겨 있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인간의 시간은 직선이다.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단 한 번이다. 그래서 인간은 비굴하게 살아갈 수가 있다.
‘이번 한번만 참으면’하고 온갖 수모를 겪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니체는 “모든 것은 다시 되돌아온다!”고 말한다.
‘영원회귀사상’이다. 이 사상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맞는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지금 이순간은 언젠가 반드시 겪었던 것이다.
영원한 반복, 영원한 떨림, 영원한 율동이 에너지장의 세계다. 물질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단 한번 일어나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는 자신이 물질적 존재라는 착각 때문에 모든 것이 단 한 번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계속 새로운 것을 원한다. 뭔가 신기한 것, 뭔가 자극적인 것을 찾는다. 그래서 인간은 현재를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
밀란 쿤데라는 찰나를 온전히 누리는 개, 카레닌을 영원회귀의 구현자로 본다. 개는 이 순간, 온전한 행복 속에 있다.
그리스 아테네의 철인 디오게네스를 견유학파라고 한다. 견유(犬儒)는 ‘개선비’다. 개처럼 사는 게 공부의 목표다.
그는 정말 개의 경지에 도달했다. 포도주 통에서 햇살을 즐기고 있는 그에게 알렉산더 황제가 찾아왔다.
“뭐 도와줄 수 있는 게 없겠는가?”하고 물었다. 디오게네스는 햇살을 쬘 수 있게 옆으로 비켜달라고 했다.
그럼 인간보다 개가 더 위대하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인간이 자발적으로 개처럼 사는 것은 개의 삶과 전혀 다르다.
개처럼 육체의 즐거움을 한껏 즐기는 인간, 그는 동시에 인간으로도 살아간다. 개보다 훨씬 많은 다른 즐거움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박재삼 시인은 ‘천년의 바람’을 노래한다.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아, 보아라 보아라/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인간의 몸을 지니고 바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 비로소 그는 ‘참을 수 있는 존재의 가벼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