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코로나 19로 출입을 자제했던 먹자골목에 갔다. 2년만이다. 왁자한 분위기 속에 술잔을 기울였다.
남자들은 다 은퇴한 사람들이었다. 다들 왕년의 얘기를 당당하게 할 만큼 사회적 지위를 누리던 사람들이었다.
왜, 나이든 남자들은 한결같이 ‘왕년’을 얘기할까? 그들의 삶의 신조는 이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근대철학의 아버지 르네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우리의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의 학교교육, 사회문화는 ‘생각’이 중심이다. 그런데 생각은 인간의 정신 중에서 극히 일부이다.
인간의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의식은 바다의 빙하처럼 밖에 드러난 부분이다.
빙하의 대부분은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듯이, 우리의 정신도 거의 다 무의식이다. 극히 일부분인 의식이 우리의 생각이다.
이 생각은 ‘수학적 이성’이다. 모든 것을 수치화시킨다. 이 수학적 이성으로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우리의 현대 문명은 이 수학적 이성이 쌓은 거대한 성(城)이다. 이 성은 우주까지 뻗어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수학적 이성이 중심이 되다보니, 우리는 거대한 무의식의 정신세계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대체로 감성, 상상력이 빈곤하다. 그들은 같은 말만 계속 반복한다.
언어가 풍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tn 자신만의 언어, 시적(詩的) 언어에 대한 감수성이 약하다.
시는 상상력의 산물이다. 상상력이 빈곤하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것만 볼 수 있게 된다.
물질이 그들의 전부가 된다. 그런데 이 물질이라는 게 허상이다. 물질은 실은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고흐, 모네 같은 인상파 화가들이 포착한 약동하는 세계는 그들의 감각에 지각되지 않는다.
약동하는 세계가 이 세계의 실상이다. 에너지인 우리의 몸과 에너지인 이 세계가 하나로 어우러질 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물질의 세계가 전부가 되는 ‘생각하는 인간’은 불행하다. 그들과 왁자하게 웃으며 술잔을 기울이지만, 슬프다.
그들도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잘 모른다. 이것은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데, ‘생각’으로만 해결하려하니 그들에게는 출구가 없다.
감자꽃이 피는 것은
하얗게 피어 말하는 것은
땅 속에 말 못할 그리움이
생겨나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지
- 이승희, <씨앗> 부분
우리가 진정으로 감자꽃을 만나는 것은 언제일까? 시인처럼 감자꽃을 보며 땅 속의 ‘씨앗’을 노래할 수 있을 때일 것이다.
과학의 눈으로 감자꽃을 보는 것은 우리 정신의 일부이다. 그것도 필요하다. 생존을 위해.
하지만 인간은 생존 너머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온 몸의 파동으로 삼라만상의 파동과 하나가 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