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존재의 집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언어가 없으면 존재도 없다는 얘기다.
‘아니? 그럼 나무라는 언어가 없으면 저 나무는 없는 거야?’ 답은 ‘없다’다. ‘응? 저 나무는 분명히 저기 있는
데?’
나무라는 언어가 없는 사람이 저 나무를 보았다고 상상해 보자. 어떻게 보일까? 나무가 나무 주변의 사물들과 하나로 섞여서 보일 것이다.
그는 혼돈 상태를 보게 될 것이다. 그가 그 풍경을 그린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나무는 거기에 없을 것이다.
성경에도 “하느님께서 빛이 있어라 함에 빛이 생겼다”고 했다. 천지창조는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언어가 우리의 생각을 상투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생각이 상투적이 되면, 삶이 상투적이 된다.
우리가 나무를 보았을 때, 실은 매번 다르게 보일 텐데, 우리는 나무라는 언어로 보게 된다.
몸은 나무를 보며 나무와 풍부한 감성으로 만나고 있는데, 우리의 뇌가 그 감성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언어를 넘어서 보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한다. 인상파 화가들은 오랫동안 사물을 보았다.
그들의 그림은 얼마나 역동적인가! 생생하게 살아있는가! 우리도 삼라만상을 오래 보는 훈련을 꾸준히 해야 한다.
나와 삼라만상이 하나로 어우러질 때까지. 자신만의 마음과 언어가 만드는 찬란한 세상을 보아야 한다.
세상의 모든 눈송이들이
지금 춤추듯 내리고 있다
어딘가 세상의
모든 눈 내리는 곳에
그래, 나의 애인은
사랑을 다짐하고 있다
누군가 세상의
그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 황인숙, <세상의 모든 아침> 부분
우리는 평소에는 언어로 세상을 본다. 몸이 굳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다 딱딱하게 굳어 있다.
하지만 사랑을 하게 되면, 몸이 스멀스멀 풀린다. 삼라만상이 풀어진다. 하나의 율동 속으로 들어간다.
‘세상의 모든 아침’을 맞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