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by 고석근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에로티즘, 그것은 죽음까지 인정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조르주 바타유,『에로티즘』에서



인터넷 뉴스를 검색하다가 ‘80대 노모 살해한 후 PC방 가서 춤춘 아들’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았다.


그는 80대 노모를 둔기로 잔혹하게 살해하고서 PC방으로 이동해 음악 방송을 시청하며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다시 어머니의 주검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 평상시처럼 일상생활을 이어갔다고 한다.


이 얼마나 엽기적인 사건인가! 그는 정신병원 입원 문제로 어머니와 갈등을 겪어왔다고 한다.


이 사건을 단지 ‘정신병자 아들이 저지른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사건’으로 치부해 버리면 그만일까?


정신병자는 낮에 꿈꾸는 사람이라고 한다. 소위 정상적인 사람은 밤에 잘 때만 꿈을 꾸고.


그의 꿈속이나 정상적인 사람들의 꿈속은 같다. 단지 정상적인 사람은 잠을 자지 않을 때는 꿈을 꾸지 않아, ‘상식’에 맞게 행동을 할 뿐이다.


결국 인간의 무의식은 같다. 노모를 잔혹하게 살해한 아들이나 우리는 크게 보면 같은 것이다.


정신 줄 놓지 않고 상식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다수인데, 세상은 이 모양이지 않는가?


정상적인 사람들은 이따금 ‘집단적 광기’에 젖기 때문이다. 지금도 ‘아우슈비츠’는 계속되고 있지 않는가?


왜 인간은 광기에 쉽게 빠져버리는가? 프랑스의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는 그의 저서 ‘에로티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에로티즘, 그것은 죽음까지 인정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인간의 깊은 무의식에는 두 개의 본능이 있다고 말한다. 에로스(삶의 본능)와 타나토스(죽음의 본능)다.


노모를 잔혹하게 살해한 아들의 에로스는 어땠을까? 아마 그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절망은 그의 생(生)의 의지를 꺾게 되고, 그의 무의식에서는 차츰 죽음의 본능이 깨어났을 것이다.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은 늘 붙어 있다. 삶의 본능이 충만하면, 죽음의 본능도 함께 충만하다.


우리는 삶의 절정에서 외치지 않는가? “죽여주네!” 하지만 삶의 절정에서 우리는 죽지 않는다.


일상에서 삶의 절정이 없는 사람은 죽음의 본능에 쉽게 빠져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늘 생의 의지가 충만해야 한다.


그렇게 사랑하다 죽어버려야 한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쉽게 죽음의 향기에 취하게 된다.


죽음의 향기에 취한 아들은 노모를 살해하고서도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다. 죽음의 춤을 추게 된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하늘에는 늘 죽음의 잿빛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지 않는가?



후, 후, 후, 후! 하, 하, 하, 하!

후, 후, 후, 후! 하, 하, 하, 하!

후, 하! 후, 하! 후하! 후하! 후하! 후하!


땅바닥이 뛴다, 나무가 뛴다.

햇빛이 뛴다, 버스가 뛴다, 바람이 뛴다.

창문이 뛴다, 비둘기가 뛴다.

머리가 뛴다.


- 황인숙, <조깅> 부분



시인은 약동하는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이 세상은 늘 격렬한 춤이다.


삼라만상, 사랑하다가 죽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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