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포스의 미소를 상상하라!

by 고석근

시시포스의 미소를 상상하라!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인가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 대해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상실의 시대 (원제:노르웨이의 숲)』에서



나는 오랫동안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다. 눈을 감고 누워 있으면, 시골의 장례식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죽음의 본능(타나코스)’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도무지 사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였다.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시시포스 신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없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많은 사람들이 허무감에 젖어 자살을 한다.


하지만 나는 자살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깊은 허무의 강물에 몸을 맡겨 흘러갈 뿐이었다.


그러다 긴 세월이 지나고 50대 초에 불안장애에 걸렸다.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길을 가다가도 주저앉아야 했다.


수시로 하늘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귀에서 강한 바람 소리가 났다. 토할 것처럼 속이 매스꺼웠다.


처음에는 이러다 죽지 않을까 두려웠다. 하지만 의사는 절대 죽지 않는다며 걱정하지마라고 했다.

절대 죽지 않는 발작! 나는 차츰 안정감을 찾아 찾아갔다. 시간 날 때마다 고전을 펼쳐들었다.


오! 도덕경이 이해가 되었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글자가 내 온 몸에 강하게 와 닿았다.


발작이 일어나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했다. 무위(無爲),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것이 나를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했다.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아무것도 하지 않으나 이루지 못하는 게 없다. 천지자연의 이치였다.


내 몸의 운행 법칙이었다. 나는 나의 불안장애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나의 운명을 사랑하게 되었다.


무위의 힘으로 버티며 강의도 하고 일상생활도 했다. 나는 내가 시시포스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시시포스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지옥에 떨어져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벌을 받게 된다.


바위는 정상에 오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밀어 올려야 하는 영원한 고된 노동이다.


영원히 반복적인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시시포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발작이 올 때마다 발작을 사랑했다.


카뮈는 “시시포스의 미소를 상상하라!”고 말한다. 그는 시시포스의 미소를 보여준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 오는 이 시간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의식의 시간, 불교에서 말하는 ‘알아차림 명상’이다. 아래로 굴러 떨어진 바위에게 다가가는 시시포스.


그는 계속 반복적인 고된 노동을 하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게 되었다. 바위에게 다가가는 자신을 온 몸으로 느낄 때, 그는 미소 짓게 된다.


나는 발작으로 주저앉아 내 온 몸의 감각을 느낄 때, 내 몸에는 깊은 평온이 왔다. 나는 미소 짓게 되었다.


나는 알아차림 명상이 어떤 순간에도 사람을 미소 짓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카뮈는 “시시포스가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으며 생각한다. 상실의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인가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 대해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의 무한히 반복되는 ‘상실과 슬픔’은 시시포스의 형벌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예기치 않은 슬픔에 대한 지혜를 배우지 못하는 걸까?


이 세상을 잘 들여다보자. 아비규환의 생지옥이 아닌가! 하지만 그들은 커피에 취해, 술에 취해, 소비의 즐거움에 취해 ‘즐겁게’ 살아간다.


그래서 그들은 절박하지 않다. 그들의 일상은 견딜만하다. 깊은 공허감이 몰려와도 ‘뭐 사는 게 다 이런 거지’ 하고 넘어가게 된다.


그들은 서서히 죽어간다. 우울증이 오고 죽음의 향기에 취하게 되어, 어느 날 갑자기 자살을 한다.


그들은 요양원에 가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멀쩡한 정신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게 된다. 그들은 깊은 산 속에서 자신들만의 낙원을 이뤄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삶을 직시해야 한다. 신음하는 우리의 몸을 알아차려야 한다.


상실과 슬픔의 반복적인 형벌을 받고 있는 우리의 영혼을 고요히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미소 지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비로소 우리의 운명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보다 우월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 눈맞춤은 대홍수가 휩쓸고 간 자리에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한 생명력과 닮았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 눈맞춤은 “존재하라!”고 외친

신의 첫 마디 말씀과 같다.


- 칼릴 지브란, <연인> 부분



우리는 ‘연인의 첫 눈맞춤’을 잃어버렸다.


우리의 원초적인 상실이다.


이후 우리는 ‘상실과 슬픔’을 무한히 반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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