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和)와 쟁(諍)은 본래 하나다

by 고석근

화(和)와 쟁(諍)은 본래 하나다


‘이 사람은 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서 머리가 타락하지 않았구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많은 것을 보고 행하고 겪으면서 정신은 열리고, 마음은 넓어지고, 태초의 호기를 잃지 않았구나.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오래전에 자주 들은 이야기, 코끼리 코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를 뱀으로 알고, 다리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는 큰 기둥으로 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코끼리의 본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넘어서야 한다.’


지금은 이 이야기에서 다른 지혜를 이끌어내야 한다. 각자 경험한 것은 한계가 있다.


하지만, 각자의 경험을 다 모으게 되면, 우리는 코끼리의 본 모습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서로 자신이 경험한 것이 옳다고 싸우는 것을 어리석은 행동으로 치부하지 말고, 그 싸움(諍)을 화(和)로 변환시키자는 것이다.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말하는 화쟁사상(和諍思想)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경험이 있다.


그 경험에서 깨달은 것은 커다란 지혜다. 따라서 누구나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맞다. 하지만 그 지혜들은 어떤 측면에서만 맞다. 그 지혜들로 전체를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의 생각이 옳고 누구의 생각은 틀린다는 고정 관념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언론매체에서 여러 형태의 토론회를 보면서, 주로 논객들의 승부에 관심을 갖는다.


학교에서 토론회를 할 때도 대체로 두 개의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학생들을 토론하게 한다.


어느 게 옳고 어느 게 틀리는가?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가? 우리는 이제 이러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보며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이 사람은 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서 머리가 타락하지 않았구나. 이 사람은 많은 것을 보고 행하고 겪으면서 정신은 열리고, 마음은 넓어지고, 태초의 호기를 잃지 않았구나.’


하지만 많은 여성주의자들은 그를 마초, 남자다움을 지나치게 과시하거나 우월하게 여기는 남자로 본다.


실제로 조르바는 ‘여자라는 가여운 동물’, ‘여자는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 말을 거침없이 한다.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시각들은 다 조르바의 일면을 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모든 생각들을 다 받아들여야 한다.


그럼 모든 견해들을 다 받아들이면, 조르바를 진정으로 알게 될까? 그 모든 것들을 다 모아도 조르바의 진면목은 알 수 없다.


조르바는 물질로 보이는 육체를 가진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는 에너지장이기 때문이다.


육체의 존재로 보면 그는 작은 하나의 생명체이지만, 에너지장으로 보면 그는 삼라만상과 하나로 어우러지는 존재다.


따라서 그를 객관적으로 분석해서는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그를 진정으로 알기 위해서는 우리도 하나의 파동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의 파동으로 만날 때 우리는 어떤 느낌, 직관, 통찰로 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조르바처럼 자유인이 되려 할 때, 우리는 하나의 파동, 율동이 된다. 파동, 율동이 되지 않고 그를 알려고 하면 그는 캄캄한 어둠 속으로 잠겨 버릴 것이다.


우리가 ‘옳음과 그름’이라는 이분법에 빠져 있으면, 세상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보이게 된다.


하지만, 이분법의 틀을 깨고 나와 천지자연과 하나로 어우러지게 되면, 이 세상은 커다란 하나의 춤판이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이 세상을 훤히 알게 될 것이다. 조르바가 나이고 내가 조르바인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세상, 우리는 거대한 하나의 생명체를 보게 될 것이다.



하! 삼도내마저 말라붙어

차안과 피안의 경계가 없어졌다


- 반칠환, <가뭄> 부분



시인은 가뭄 때 잠시 드러난 천지자연의 맨몸을 본다.


‘차안과 피안의 경계가 없어졌다’


다시 비가 오고, 바람이 불 것이다. 천지자연은 몸을 일으켜 온갖 조화를 다 부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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