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위하여

by 고석근

‘글쓰기’를 위하여


네, 저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몇 번이나 말해줘야 해요? 나는 아무것도, 아무도 안 믿어요. 오직 조르바만 믿어요. 조르바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이라서가 아니에요. 절대로, 정말 절대로 더 낫지 않죠! 그놈도 짐승이에요. 하지만 내가 조르바를 믿는 까닭은 내가 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놈이기 때문이죠. 나는 오직 그놈만을 잘 알 뿐, 다른 것들은 모두 헛것들이에요. 조르바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조르바의 귀로 듣고, 조르바의 위장으로 소화하죠.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최근에 ‘글쓰기 모임’이 하나 생겼다. 다양한 연령대가 모였다. 하지만 한결같이 글쓰기를 힘들어했다.


회원들의 글에는 ‘글쓰기의 고뇌’가 훤히 보였다. 그렇다. 우리는 사는 게 힘들어서 글을 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생(生)의 고(苦)’를 찾아내야 한다. 나는 남들에게 무시당하는 게 싫어서 글을 썼다.


까만 얼굴의 시골 아이가 읍내에서 학교를 다니며, 희멀건 읍내 아이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 글쓰기였다.


어느 날 ‘추억’이라는 시를 써서 그 당시 중학생들이 즐겨보던 잡지 ‘합격생’ 독자란에 투고했다.


활자화된 나의 시, “자(저 애) 시가... .” 하는 말을 바람결에 들으며 나는 자전거를 힘껏 달렸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학원’이라는 잡지 독자란에 소설이 실렸다. 한 아이가 은근히 다가왔다.


대학 때는 학보사에서 시행했던 ‘논문 현상공모’에 당선되었다. ‘남녀 불평등에 대한 소고(小考)’라는 짧은 논문이었다.


이 논문 당선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나의 길’을 가게 했다. 나의 길, 글쓰기가 열어 준 것이다.


처음에는 남들이 무시하는 게 싫어 쓴 글이 나의 등불이 된 것이다. 그 등불이 밝혀주는 길을 힘겹게 가다 언젠가부터 ‘글쓰기의 맛’을 알게 되었다.


글쓰기는 ‘삶의 비의(秘義)’를 드러내준다. 삶의 비의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 건, 우리가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언어로 본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우리의 언어가 만든 허상들이다.


삼라만상은 우리의 생각(언어)이 밖으로 투사된 환상인 것이다. 우리는 이 환상 속에서 한평생을 살다 간다.

그래서 ‘인생은 한바탕 꿈’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삶을 ‘실컷’ 살려면 언어의 감옥에서 탈주해야 한다.


언어의 감옥에서 탈주하는 방법, 그것은 언어의 안개에 가려지지 않은 우리의 말간 눈으로 이 세상을 보면 된다.


우리는 조르바의 눈을 가져야 한다.


‘내가 조르바를 믿는 까닭은 내가 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놈이기 때문이죠. 나는 오직 그놈만을 잘 알 뿐, 다른 것들은 모두 헛것들이에요. 조르바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조르바의 귀로 듣고, 조르바의 위장으로 소화하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나는 피로 쓴 글씨만 믿는다”고 했다. 우리는 몸에서 솟아나는 언어, 그런 언어로 글을 써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삶의 고통’을 직시해야 한다. 현대의 고도 자본주의는 엄청난 물량으로 우리를 온갖 쾌락에 젖게 한다.


TV를 켜면 깔깔거리는 사람들만 나온다. 삶이 마냥 즐거운 것 같다. 하지만 인생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리 안의 영혼은 늘 울고 있다. 물질만 눈부시게 빛나고 사랑이 없는 황금의 제국에서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따라서 글쓰기는 영혼의 비명을 듣고 자신의 언어로 옮겨쓰는 일이다. 오롯이 살아있음 그 자체다.



회상은 그저 말없이 내 앞에

그 긴 두루마리를 펼칠 뿐입니다

나는 내 삶을 읽으면서 스스로 혐오에 떨며

저주하고 괴로움에 한탄하며 쓰디쓴 눈물을 흘리면서도

절대 슬픈 구절들을 지우지 않습니다.


- 알렉산드르 푸시킨, <회상> 부분



우리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저주하고 괴로움에 한탄하며 쓰디쓴 눈물을 흘리면서도’ 어느 것 하나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절대 슬픈 구절들을 지우지 말고, 온몸으로 다 기록하며 자신의 길을 열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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