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슬픔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인가.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 성탄절 잔치에 들러 진탕 먹고 마신 다음, 잠든 사람들에게서 홀로 떨어져 별은 머리에 이고 뭍은 왼쪽,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해변을 걷는 것, 그러다 문득, 가슴속에서 인생이 마지막 기적을 완성했다는 것, 곧 인생이 한 편의 동화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최근에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매일 산에 올라 명상을 한단다.
틱낫한 선사는 명상의 기쁨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숨을 들이쉬며, 몸을 고요히 하네./ 숨을 내쉬며, 미소 짓네./ 지금 이 순간에 머물며/ 이 순간이 경이로운 순간임을 아네.’
누구나 명상을 하게 되면, ‘경이로운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가면?
다시 진흙투성이의 일상으로 돌아오면? 행복한 순간이 얼마나 있는가? 틱낫한 선사의 경지에 도달하더라도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말하기가 힘들 것이다.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에게 없는 ‘공감력’이 있기 때문이다. 참혹한 이 세상에서 혼자 행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은 이 공감의 힘 때문에 찬란한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동물’이 되었다.
불교의 경전 ‘유마경’에는 유마 거사의 슬픔이 나온다. 그는 말한다.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
그는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의 비유를 든다. 그는 말한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만 피어난다.”
‘진흙(속세의 삶)이 없다면 연꽃(깨달음)도 피어날 수 없다.’ 대승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진흙투성이의 이 세상은 어떤가? 서로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정글이다. 살아남으려면 남을 죽여야 한다.
만인이 만인을 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 세상은 생지옥이다. 이 생지옥에서 혼자 행복할 수 있을까?
‘오늘도 무사히’ 살아남은 우리는 슬프다. 슬픔을 잊기 위해, 바쁘게 살아간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상처투성이의 우리에게 이 세상은 온갖 쾌락을 선사한다. 우리는 쾌락에 취해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고뇌와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다. 일하며 고뇌를 느끼고 쉬면서 권태를 느낀다.
명상을 하게 되면, 잠시 잠깐 경이로운 이 세상을 느낀다. 하지만 우리 마음 깊이 들어온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조르바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간다.
단독자의 삶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삶이다. 모래알처럼 흩어져 살아가는 파편화된 개인과는 다르다.
남과 연대하는 개인이다. 혼자 우뚝 설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때 진정한 행복이 올 것이다. ‘문득, 가슴속에서 인생이 마지막 기적을 완성했다는 것, 곧 인생이 한 편의 동화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 이정록, <의자> 부분
불교에서는 자비(慈悲)를 가르친다. 사랑(慈)과 슬픔(悲)은 하나라는 것이다.
시인은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는 먼저 통증을 느낄 줄 알아야 하다.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의자가 되어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