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있는가?

by 고석근

신은 있는가?


나는,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지식도, 미덕도, 선도, 승리도 아닌, 보다 위대하고 보다 영웅적이며 보다 절망적인 것, 즉 신성한 경외감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공부 모임 시간에 한 회원이 질문을 했다. “신은 있습니까?” 그의 얼굴 표정은 내게 ‘네, 아니오’로 대답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런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네, 아니오’ 둘 다 정답도 되고, 오답도 될 것이다.


인간의 신에 대한 관점은 시대마다 달랐다. 원시인들은 삼라만상을 다 신으로 보았다.


어린아이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이 세상이 다 경이롭다. 신비로 가득 찬 세상, 다 신이다.


눈에 보이는 건 다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강한 힘에 대한 경외감, 신이라는 말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현대의 어린아이들은 신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의 어린아이들과 원시인들의 삶의 방식이 다른가?


그들은 모두 이 세상을 경건하게 살아간다. 경건한 삶, 그들에게 신은 있어도 없어도 마찬가지다.


과학으로 정신 무장을 한 현대 문명인들은 삼라만상에서 신비를 느끼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신은 무엇일까?


그들에게 신은 너무나 먼 존재일 것이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말하듯 ‘신은 인간의 이성 너머의 존재’일 것이다.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존재인 신은 인간의 마음을 분열시키게 된다. ‘지금 여기의 생생한 삶’을 부정하게 된다.

중요한 건, 저 멀리 있는 신이니까. 그들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 저 멀리 있는 신의 곁으로 가야 하니까.

한 회원이 말했다. “저는 기도할 때 온몸으로 신을 느껴요.” 그 회원이 이 신성(神性)의 순간을 항상 간직하고 살아가면, 그의 삶은 눈부시게 아름다울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만 신을 만나고, 일상에서는 속물적으로 살아간다면, 그의 삶은 황폐해질 것이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통해 삶의 비의를 깨닫게 된다.


“나는,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지식도, 미덕도, 선도, 승리도 아닌, 보다 위대하고 보다 영웅적이며 보다 절망적인 것, 즉 신성한 경외감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신성한 경외감이 없는 ‘지식, 미덕, 선, 승리’는 인간을 망가뜨리게 된다. 인간을 한없이 부풀게 하다 펑 터져 버리게 한다.


인간의 자아는 끝없이 오만방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자아가 신성한 경외감에 의해 제어되어야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


동물은 본능에 의해 제어되기에 동물의 세계는 한없이 아름답다. 인간만이 괴물이 된다.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제는 자아의 문제다. 자아를 어떻게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는가?


항상 신성한 경외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신은 중요하지 않다. 이미 그는 신과 함께 살아가니까.


신성한 경외감을 잃어버린 사람은, 신을 믿건 믿지 않건, 결국에는 악마가 되어버릴 것이다.



길바닥이 발바닥을 받아서

발바닥을 발바닥의 그곳까지 모시고 가듯이


모든 바닥과 바닥 사이에

버들강아지 같은 사랑이 물오르기를

나는 바란다.


- 이안, <바닥> 부분



바닥에서 보아야 신성한 경외감에 휩싸이게 된다.


이 세상의 비의가 드러난다.


그때 우리는 가장 낮은 길바닥과 발바닥의 사이에서 물오르는 사랑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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