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나무
어른들은 동트기 전 새벽이 더 캄캄하고 어둡다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어린 나의 눈에는 전설의 고향이 방송되는 밤 10시의 어두움과 소변이 마려워서 일어난 새벽시간 어두움은 모두 캄캄하고 어두웠는데 동트기 전 새벽을 어른들은 왜 그렇게 말할까 궁금했다.
역시 어른들은 허풍쟁이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날 난 어른들의 말이 허풍이 아니라 진실이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아버렸다.
내 어린 시절 기억에 아버지는 일을 쉬는 날이 많았는데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외출할 준비를 마치고 날 기다리고 계셨다.
어딜 가나 날 데리고 다니길 좋아하시는 아버지를 난 싫어했다.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는 아버지와 함께 걷는 것이 너무 창피하고 싫었기 때문이다.
힘없고 어린 나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서 아버지 친구분 농장에 갔다.
친구분과 술상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 아버지 곁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나의 무료함을 달래줄 농장으로 향했다.
어미돼지 젖을 차지하기 위해서 고개를 디밀며 싸우는 새끼돼지들을 때어놓기도 하고 농장 지킴이 강아지 두 마리를 친구 삼아서 농장 마당을 뛰어놀면서 아버지 술자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가을 햇빛이 산나무 뒤로 넘어가자 산꼭대기에 걸쳐있던 구름이 주홍빛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아버지의 얼굴도 붉은빛으로 변하더니 술자리가 끝이 났다.
그날은 아버지가 붉은 얼굴로 내 이름을 어눌하게 부르는 것과 농장 비탈길을 위태하게 비틀거리며 걷는 모습이 유난히 싫었다,
아버지 손을 잡고 버스를 기다리다가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술 안 먹는다며! 창피해!”갑자기 악을 쓰며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자 당황한 아버지는 순간 비틀거리더니 “ 이 싸가지 없는 가시내가! ” 라며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무슨 용기였는지 아빠의 버럭 고함에도 기죽지 않고 아빠를 노려보면서 다시 한번 쏘아붙였다. “ 아빠 혼자 버스 타고 가! 난 나 혼자 걸어갈 거야! “ 연신 내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가 날 뒤쫓아 올까 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산으로 뛰어갔다.
도대체 무슨 용기였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우리 집은 버스를 타고 가지 않는다면 산을 넘어가야 했다. 사실 그 산길도 난 잘 모르고 있었는데….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 걸을수록 산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주홍빛 사이로 보이던 빛이 사라지더니 나무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던 빛도 사라져 버렸다.
순간 캄캄해진 어둠에 시야가 익숙해지기까지 잠깐 이었지만 눈감고 보는 어둠보다 눈 뜨고 보는 어둠이 더 무섭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온 신경이 고드름처럼 뾰족하게 솟아나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들리던 나뭇잎 바스락거리던 소리, 신발 앞코에 부딪혀서 떼구루루 굴러가던 작은 돌멩이 소리, 두 팔을 벌렸을 때 스치던 나뭇가지의 흔들거리는 소리, 사람 인기척 소리에 놀랐는지 푸드덕 날갯짓 치던 새소리, 나무 위로 뛰어 올라가는 다람쥐 소리, 전설의 고향 어두운 숲에서 늘 들리던 뻐꾸기 소리, 바람에 나무끼리 부대끼면서 내던 빗소리.
얼마나 걸었는지도 몰랐다. 뻐꾸기 소리를 들으면서 시간도 알려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상상했다.
하늘을 덮은 나무숲을 벗어나면 달빛을 불빛 삼아 길을 찾아서 걷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을 무렵 물 흐르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집에 가까이 왔구나!
순간 다리에 천근을 매달아 놓은 듯 걸음 떼기가 너무 힘들고 숲길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올까 봐 휘젓는 두 팔을 지탱해 주던 어깨에서 힘이 빠져서 팔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물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내 몸은 물에 빠진 솜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눈앞이 희뿌옇게 되더니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지만 눈 한번 질끈 감아 눈물 뚝! 떨어뜨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달빛도 내가 집에 가까워지고 있는 걸 알았는지 해처럼 산 넘어 숨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 너무 캄캄해졌다. 정말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난 저 물을 건너가야 집으로 갈 수 있는데…. 눈을 비벼보고 몇 번을 질끈 감았다가 떠봐도 물을 건너가야 할 보가 보이질 않았다.
집으로 가기 위해선 난 또 한 번 용기를 내야 했다,
물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곳까지 가서 다리를 앞으로 쭈욱 내밀었더니 발바닥에 차가운 물이 느껴졌다.
심호흡 한 번 하고 두 발을 물속으로 푹 담그고 산길이 아닌 물길을 걷기 시작했다.
너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나의 허리 사이로 갈라지며 흐르는 물소리만 들리는 그곳에서 집으로 갈 수 있기를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걷기를 얼마나 했을까?
거짓말처럼 흐르는 물이 보이기 시작하고 내가 잡은 수초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정말 거짓말처럼…. 내가 걷고 있는 물길의 끝 도 보이기 시작했다.
집으로 걸어가는 둑길엔 새벽녘 빛이 내려앉아서 둑 길 옆으로 피어있는 야생화도, 저 멀리 산등성이도, 이웃집에서 짖어대는 누렁이도, 힘차게 울어대는 수탉도 보였다.
고드름처럼 솟아 있던 나의 신경들이 녹아내리면서 나의 걸음도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집 문을 열자마자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어 버렸다.
눈을 떴을 땐 다시 캄캄한 밤이었지만 집안의 전등을 켜고 내가 집안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벗겨져서 나뒹굴고 있는 나의 신발 밑바닥이 사라져 버린 걸 발견하고는 그날 그 밤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음을 깨달았다.
그 밤에 나의 신발 밑창은 산길의 어느 녀석이 물고 갔을까? 물길의 흐름을 따라 간 걸까?
분명 기억한다.
어린 시절 어렴풋이 알게 되었던 동트기 전 새벽의 그 캄캄함과 어둠 속 두려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