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소유격을 붙인 걸 용서해 주시길
나는 다비드를 좋아한다. 죽기 전 보고 싶은 작품 세 개 중 두 개가 다비드의 작품일 정도로 말이다.
나는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소크라테스의 죽음’ 같은 그림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숨이 멎는다. 단순히 잘 그려서 좋다기보다는, 그 안에 있는 기개, 각자의 자리에서 흩어지지 않는 정신들이 좋다. 서로 달라 보이지만 그 올곧고 독립됨만큼은 일관된 기개들. 그림뿐만이 아니다. 음악도 그렇다. 나는 그룹보다는 솔로 아티스트를 좋아한다.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노래를 꾸미는 사람. 나는 그런 기개를 좋아한다.
이러한 취향들은, 모두 ‘나만의 것’을 찾으려는 내 몸짓의 일부다. 나는 취향이 나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내가 신고전주의 화풍의 그림들을 좋아하고, 솔로 아티스트의 팝송을 들으며, 사회학 논문을 읽는 것. 이런 자잘한 것들이 모여 나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고독이나 고립을 비극처럼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건 강자의 권리라고 생각해 왔다. 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나만의 감각을 지키는 것. 그건 나에게 주어진 책임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방식이다.
그리고 이런 작업이 반복되고 쌓이면, 곧 시민으로서 나의 역할이 정해진다고 생각한다. 다비드는 화가이기 이전에 시민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취향인 예술로 공화주의 이념과 혁명정신을 시각화했다면 나의 길은 다를 것이다. 일단, 나는 그림을 못 그리니까.(안 웃기려나... 나름 회심의 말이었다)
흐흠- 일단 아직 나는 내 취향을 정립해나가는 과정이기에 자세히 말하기에는 불확실한 게 많다. 다만 나는 저우언라이처럼 되고 싶다. 소크라테스처럼 되고 싶다. 그들의 인생을 모방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인생의 주요 골자를 따르고 싶다는 내용이다.
저우언라이는 중국의 격동기 속에서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격렬한 정치의 중심에서도, 그는 타인을 잊지 않았고, 순간의 분노보다 긴 호흡의 이성을 선택했다.
소크라테스는 지식인이란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고, 자기 자신을 기꺼이 위험에 내맡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감동적인 장면이 아니라, 철학이 삶 그 자체가 되었을 때 어떤 태도를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천의 골격이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다.
크게 드러나지 않아도, 조용히 버텨내는 힘으로
곧게 나의 진리를 지키고 탐구해 나아가는 삶.
그리고 나는 지금은 조금 방황할지라도 너무도 불안정할지라도, 내가 이렇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