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고백합니다 8

생각에 매몰되어

by 산넙치

대학을 다니던 날 1시간이란 시간을 지하철을 탄 뒤 20-30분을 버스를 타고 역에서 대학까지 가야했습니다. 아침에는 특히나 사람이 많아 버스는 붐비고 오래걸려 40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날은 아침에서 점심 그 중간쯤이 되어 버스 안이 한산하고 가는 길도 여유로웠습니다. 저는 창가에 앉아 과일이나 야채가 가게를 넘어 길까지 진열되어있는 시장을 바라보며 갈 수 있었습니다. 어떤 아저씨가 과일을 보여주려 박스의 윗단을 자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번 해봐서 그런지 한번에 자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는데, 그 와중에도 윗단이 접힌 부분에서 조금을 남기고 잘렸습니다. 저는 그걸 보고 '불편하다'라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쓰지 않으니 아저씨는 그렇게 한 번에 박스를 자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강의를 들으면서도 그 다 자르지 못한 윗단이 생각이 났습니다. 윗단의 단면에 베이는 상상도 해봤고, 지나가며 다 잘리지 않아 아쉽다는 말을 하는 행인도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쉽게 생각에 매몰되어 아무것도 잡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책을 좋아했다면 이런 상상력으로 작가를 꿈꿨을지도 모르겠지만, 그정도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말라 했던 가벼운 성형수술을 엄마가 기어이 가서 상담을 받고 하고 온 날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외모를 신경쓰셔 하려고 하는 것 같아 말렸으나, 다른 이유도 대가며 계속 하겠다는 말에 '그래, 언제 엄마가 내 말을 잘 들어줬다고.'하며 신경을 껐습니다. 수술 당일인 오늘, 엄마는 수술하고 쓰고 오겠다던 모자를 놓고 왔다고 1시간 10분 거리를 걸려 병원까지 가져다주길 말했습니다. 전날에는 제가 다음날 아무데도 가지 않거나, 기껏해야 오후에 시위를 나가지 않을까 생각하며 마음 놓고 매운 라면을 먹었었습니다. 왜 수술을 하는데 그런 것 하나 준비하지 않는지, 가져오라는 모자는 왜이렇게 또 이상한지, 온갖 생각을 하다 그냥 금방 갔다올 생각에 씻고 준비를 했습니다. 교통카드를 찍고 나서 지하철을 타기 직전 문자가 왔습니다. 바로 오지 말고 좀 더 기다렸다 오라는 말이었습니다. 전 후 상황은 모두 이해 가능한 것이었지만, 저에게는 묘한 분노가 일었습니다. 타이밍 참 좋다라는 말과 함께 카톡을 폭탄처럼 보내고 지하철에서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모자를 쓰고 기다리게 한 엄마와 같이 오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머리는 갑자기 깨질 듯이 아프고, 전날 먹은 라면때문에 뱃속은 부글부글 끓으며 신음했습니다. 병원에 모자와 선글라스만 맡기고 바로 집으로 향했습니다. 간신히 아픈 걸 참아가며 집에 도착해 씻고, 여전히 아린 배를 폭식으로 눌렀습니다. 10분 공부하다 침대로 쓰러지고 나서 그런 망상을 했습니다. 엄마한테 신경질을 부려 미안하다고하는 꿈이었습니다. "미안, 아팠어. 그래서 너무 힘들었어"라고 말하는 것이 제 머릿속 상상인지, 입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미안하다고 말하는 엄마의 카톡을 보고 잤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바탕 소동은 자기 전까지의 시간을 따지면 1시 반이었고, 지금의 저는 충분히 무언가를 할 수 있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스터디와 프로젝트를 준비할 것도 많았고, 풀어야할 문제가 늘어나면서 공부할 것도 늘어났습니다. 또 한동안 나가지 않은 시위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다시 가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스트레스, 분노, 자기연민, 그리고 미안함에 매몰되어 잠을 택했습니다.


사소한 것으로 매몰되는 일은 가끔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아마 어렸을 때 좋아하는 아이돌이 스텝인가 매니저인가에게 맞을 뻔했다는 영상을 보고 공부를 하나도 못한 기억을 떠올리면, 아마도 제 피나 dna에 박혀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예민함과 망상증이 어딘가에 쓰였으면 좋겠지만, 아직 저한테는 제 인생을 방해하는 장애물같기도 합니다. 그저 떨쳐낼 수 없으니 같이 사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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