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트롬쇠 여행
의과대학 예과를 다닐 때 2박 3일간 지리산 종주를 한 적이 있다. 텐트를 치고 야영하는 게 가능했던 시절. 아마 세석 평전이었던 것 같다. 새벽 세 시쯤 잠이 깨어 텐트 밖으로 나왔다. 깜깜한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 와, 탄성을 지르는데 갑자기 별똥별이 떨어진다. "아차, 소원"하는데 별똥별이 연이어 계속 나타난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천체와 천문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게. 나중에서야 그게 페르세우스 유성우였음을 알았고.
제주 별빛누리 공원에서 개장 첫 주에 토성 고리와 위성 타이탄을 보았고, 시드니 천문대에선 북반구에서는 볼 수 없는 남반구 별자리를 관찰. 남십자자리의 아크룩스는 쌍별인데 천체망원경으로 관찰해 보면 조그만 다이아몬드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는 것처럼 정말 예뻤다.
이런 내게 오로라는 당연히 버킷리스트 중 하나. 가장 볼 확률이 높고 극야도 경험할 수 있는 노르웨이 트롬쇠를 목표로 정했다. 내 스케줄에 맞는 12/29일 출발 2박 3일이 파리 직항으로 가능했다. 호텔과 렌터카도 순조롭게 예약하고.
그런데 내가 여행하는 3일 동안 일기예보가 아주 좋지 않았다. 트롬쇠 공항 렌터카 직원도 내 일정을 보더니 오로라 보는 게 거의 불가능할 거라고 하고. 하지만 난 여행에서 날씨 운이 좋다. 믿어 보자.
호텔에 도착했는데 생각보다 날씨가 맑다. 달도 별도 보이고. 도심 건너편 언덕의 Fjellheisen 전망대에 가보기로. 왕복 케이블카가 2인 1190 크로네니까 17만 원. 정말 비싸다. 케이블카를 타고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트롬쇠 야경을 보고 있는데 눈보라가 몰려온다. 전망대에 도착하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시간은 저녁 10시. 돈이 아깝지만 내일을 위해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다음날 아침. 해가 뜨지 않는 겨울, 트롬쇠는 은은한 푸른빛이 감도는 백색의 겨울 왕국이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순수한 아름다움. 몽환적이라는 게 이런 걸까? 도시 전체가 하얀 눈에 뒤덮여 있다. 곳곳에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에 진짜 눈이 쌓여 있고. 거리와 상점의 불빛에서 여기가 진짜 크리스마스 마을이란 생각이 든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순수한 걸 경험해 본 적은 없었다.
날씨 예보는 조금 좋아졌지만 와이프 컨디션이 좋지 않아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올 한 해 우리에겐 좋은 일들이 많았기에 오로라를 보지 못하더라도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호수가와 해변, 트롬쇠 곳곳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저녁 7시쯤 오로라 관측으로 유명한 telegrafbukta 해변가로 향했다. 호텔 직원의 의견에 따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오로라 헌팅을 하기보다 한 곳에서 오로라 피싱(내가 만든 말이다)을 하기로. 계속되던 눈발이 8시쯤 멈추었다. 점점 하늘이 맑아진다. 하지만 아직 구름 지수 100%에 오로라 활동지수도 미미하다. 더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한 시간쯤 후 다시 눈이 내린다. 일단 차 안으로 들어왔는데 눈이 점점 더 거세진다. 주차장에 있던 십여 대의 차들이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하고. 오로라 예보도 다시 나빠졌다.
10시 반쯤 눈이 조금 약해져서 해안가에 다시 섰다. 여긴 눈이 정말 하얗다. 사람들이 밟은 자리도, 차들이 지나간 도로도. 온통 순백이다. 눈을 감고 태양에서 쏟아져 나와 내 눈앞에서 춤추고 있을 전자와 양성자 입자를 생각해 본다. 내 얼굴에서 느껴지는 눈송이와 함께.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새벽 두 세시까지 기다린다면 잠시 오로라 빛을 볼 수도 있겠지만 내 버킷리스트인 오로라와 그런 식으로 만나고 싶진 않다. 극야를 너무 사랑하게 된 만큼 언젠가 트롬쇠로 다시 오리라. 그땐 일주일 정도. 일곱 권의 책과 함께.
파리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 옆좌석에 앉은 친구가 오늘 새벽에 찍은 오로라 사진을 정리하고 있다. 아, 아쉽다. 역시 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 양해를 구하고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내게 전송해 주겠다는데 그럴 것까진.
잠시 후면 대한민국은 2026년 새해가 됩니다. 제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들 덕분에 제가 더 열심히 파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새해에도 항상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