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을 돌려서, 돌리지 않아서
파리로 와인 유학을 온 지 4개월째. 그동안 술은 거의 와인만 마신 것 같다. (마신 와인보다 시음하면서 뱉은 와인이 더 많은 것 같기도) 연말이라 그런지 한국에서 친한 사람들과 흥겹게 마시던 소주와 맥주가 조금 그립긴 하다.
나는 술 중에서는 와인이 가장 건강 친화적(?)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두 가지. 첫째는 잔을 돌리기 때문이고, 둘째는 잔을 돌리지 않기 때문이다.
한동안 프렌치 프레독스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프랑스인들은 포화지방 섭취가 많은데도 심혈관 질환 발생률이 낮은데 이게 레드와인 때문이라는 것. 레드와인에 있는 폴리페놀 등 풍부한 항산화제가 성인병을 예방한다는 이야기다. 믿고 싶지만 내과 의사로서 볼 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정상적인 식사로 충분히 섭취할 수 있고 어느 정도 이상은 더 먹어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에. 같은 이유로 시중에 나도는 비타민, 항산화제등등의 건강보조식품도 난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큰 부작용도 없기에 환자분이 드시겠다면 말리진 않는다. 다만 세 가지. 첫째는 안전. 정관장이나 제약회사 등 신뢰할 수 있는 곳에서 만든 것만. 둘째는 비용. 동일 성분인데 비싼 건 다 광고비다. 그리고 세 번째. 어차피 드실 거면 믿고 드시라.
프랑스인들의 심혈관 질환이 적은 건 생활 문화 때문일 것이다. 트랜스지방이 적은 음식을 주로 먹고, 천천히 대화하며 식사하고, 자주 걷는 문화. 와인도 조금 영향을 미쳤을 수 있는데, 아마 폴리페놀이 아니라 천천히 마시는 와인 문화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먼저 와인은 Swirling (잔을 돌리는 것)하며 마시는 술이다. 와인잔을 돌리면 산소와의 접촉으로 향이 더 풍부해지고 그만큼 더 맛있어진다. 이렇게 잔을 돌리며 마시기 때문에 당연히 술을 천천히 마시게 되고.
물론 건강에는 술을 얼마나 많이, 자주 마시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마시는 속도도 큰 영향이 있는데, 혈중 알코올 농도가 급격히 올라가면 도파민 분비를 통해 중독 위험성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빨리 마시면 그만큼 많이, 자주 마시게 되고 알코올 사용장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이야기. 그래서 술은 와인처럼 잔을 돌리며 향을 음미하며, 천천히 마시는 게 좋다.
또 하나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과거에는 회식 등의 모임에서 술잔을 돌리는 문화가 많았다.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자기 주량 이상으로, 술을 억지로 마시곤 했었다. 요새 원샷을 외치는 것도 사실은 비슷하다. 전염질환의 위험성은 적겠지만 과음하게 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 하지만 와인은 술잔을 돌리는 경우도, 원샷을 외치는 경우도 거의 없기에 자기 주량껏 천천히 술을 즐길 수 있다.
와인은 잔을 돌리기 때문에 천천히 마시고, 잔을 돌리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주량껏 마시는 가장 건강 친화적인 술이라는 생각.
사실 의사로서 술 이야기는 참 부담스럽다. 절대 안 된다고 하면 쉽긴 한데 어느 정도까지는 괜찮은 게 사실이다. 모든 건 양의 문제니까.
혼술 하지 말고, 급술 하지 말고, 과음하지 말고.
가끔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서 천천히 즐겁게 마시면 정신건강에는 확실히 도움이 될 거고 육체건강에도 큰 문제없을 텐데. 그런데 의사가 이렇게 말해도 될까? 알코올 사용장애 환자가 더 늘지 않을까?
사실 이게 내 중요한 고민이었다. 하지만 최근 트렌드가 조금씩 바뀌는 게 느껴진다. 세계적으로 술의 알코올 함량이 점점 낮아지고 있고 무알콜 음료의 시장도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다. 새로운 세대들의 등장. 확실히 우리와 다른 그들이 보다 건전한 음주문화를 만들 거라는 기대가 든다. 걱정하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게 우리 세대의 역할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