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중반에 떠나는 파리 유학 20

중간고사 part 2

by 신경한

15년 전 미국 골프 아카데미. 고수로 알려진 존과 단둘이 라운딩을 했다. 마치고 클럽하우스에서 맥주를 마시는데 존이 종이와 펜을 꺼낸다. 라운드를 복기해 보자고. 골프 코스와 나도 기억 못 하는 내 샷들을 거의 정확히 분석한다. 와, 어떻게 이걸 다 기억할 수 있나? 자꾸 하다 보면 된다고 무심히 답한다.

내가 'Moonwalking with Einstein'이란 책을 본 게 아마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평범한 기자였던 저자가 미국 기억력 대회에 참가하여 우승하는 과정을 엮은 책. 고대부터 현재까지 기억술의 역사와 과학에 대해 추적하여, 기억력은 타고 나는 재능이 아니라 훈련 가능한 기술임을 밝히는 내용이다.


대회에서는 무작위로 섞은 트럼프 카드 52장을 순서대로 외워서 모두 맞추어야 한다. 저자는 미리 각 카드마다 이미지를 부여하고 (가능하면 제목처럼 엉뚱하고 강렬한 이미지로) 카드 순서에 따라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이 스토리와 이미지를 떠올리며 52장의 카드를 하나하나 순서대로 기억해 내서 결국 우승한다.

이미지로 기억해야 오래간다는 건 의과대학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은 지식이기도 하다. 이후 골프 코스를 기억해 보기 시작했다. 첫 번째 코스를 기억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 그 이후로는 뇌에 회로가 생긴 듯 많이 쉬워졌다. 요샌 세계적으로 유명한 골프장은 한 번 라운딩 하고 나서 모두 기억하곤 한다.

이번 중간고사의 마지막은 가장 중요한 와인 필기시험. 모두 주관식으로 50문제. 많은 답을 프랑스어로 써야 한다. 이유도 모르면서 어떤 글자 위엔 모자를 씌우고 점도 찍었다.

시험을 마치고 모두 1층에 모였다. 역시 불만을 터뜨린다. 다들 열심히 외운 부르고뉴 그랑크루 33곳은 하나도 안 나오고 보졸레 10 크루를 쓰라는 문제가 가장 큰 배점으로 나왔다. 모르간은 자기랑 이름이 비슷한 모르공만 기억났다고. 절반은 빈칸으로, 절반은 1-2개 썼다고 한다. 말을 안 했지만, 나는 이미지로 암기해서 10개를 다 적었다.

먼저 보졸레 지도를 머릿속에 그려 놓았다. 품질 좋은 와인을 만드는 10 크루는 모두 보졸레 북부 지방에 있다. (그 해 포도로 만들어 매해 11월 3번째 목요일에 출시되는 보졸레 누보는 거의 보졸레 남부 지역의 포도로 만든다. 장기 숙성에 적합하지 않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가족 친지와 함께 한 해를 마무리하며 마시는 가볍고 유쾌한 와인이라는 이미지로 바꾼 건 정말 대단한 발상의 전환이다.)

10 크루 중 가장 북쪽은 보졸레 이미지에 잘 어울리는 사랑, Saint-Amour. 그 아래 보졸레에 처음 포도를 심은 로마 율리우스 시저, Julienas. 그리고 Chenas, 이건 그냥 라임으로 외우고. 그 아래 언덕에 풍차가 있다. Moulin-a-Vent. 풍차 언덕 아래로는 예쁜 꽃들이 피어 있고, Fleurie. 등등. 물론 친구들에겐 너무 지엽적인 문제가 많이 나왔다고만 말했다.

다들 2주 방학 동안 잘 지내자고 이야기한다. 대부분은 가족들을 만나러 미국, 영국, 페루 등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토머스는 남아공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하고. 난 파리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다음 주 오로라를 보러 노르웨이 트롬쇠로 갈 예정.

다 같이 학교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헤어졌다. 저녁에 집에서 와인을 마시는데 단톡에 계속 글이 올라온다. 너무 힘들었다는 이야기들. 켈리가 그래도 서로 더 많이 친해진 것 같다고 한다. 힘든 걸 같이 이겨내야 동료라는 끈끈한 감정이 생기는 것 같다고, 모두 사랑한다고 썼더니 다들 하트를 날린다. 와인이 좋은 이유는 역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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