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과 시음
닥터하우스란 의학 드라마가 있다. 괴팍한 의사 하우스가 원인 불명의 환자를 진단해 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논리와 윤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다.
요새 와인 시음, 특히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하며 이 과정이 환자 진단 과정과 참 비슷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색깔을 관찰하고 향을 맡는 건 병력 청취. 입에 머금고 맛을 보며 구조를 파악하는 건 신체 검진.
병력 청취를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선입견을 갖지 않는 것이다. 환자 이야기를 꼼꼼하게 잘 들어야 한다. 처음부터 무슨 질환일 것 같다고 생각하면 중요한 단서를 놓치게 된다. 와인도 마찬가지. 향을 맡으며 무슨 와인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선 안된다. 그냥 느껴지는 향을 정확히 기술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참 쉽지 않다. 자꾸 판단하고 싶어진다.
다음으로 신체검진에 해당하는 구조 파악. 입 안에 와인을 머금고 산도와 탄닌, 알코올, 당도를 각각 5단계 중 하나로 파악한다. 그러고 나서 바디감과 밸런스, 피니쉬를 결정한다. 와인의 구조를 파악할 때는 신체검진처럼 순서대로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 물론 의과대학에서 처음 환자를 볼 때처럼 꼭 한두 가지씩 빼먹곤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진단의 단계. 이제는 맘껏 생각하고 판단해도 된다. 이 모든 정보를 통합해서 결론을 내야 하니까. 물론 환자도 와인도 전형적인 경우가 있다.
이틀 전부터 소화가 안 되고 입맛이 없었는데 오늘 아침부터 우하복부에 통증이 있다는 환자. 열이 37.5도. 오른쪽 아랫배를 꾹 누르니 아프다고 하고 손을 뗄 때 아파서 깜짝 놀란다면 거의 급성 충수염.
가장자리로 벽돌색이 감도는 연한 루비색의 레드 와인. 장미와 타르 향이 나는데 입 안에서 강한 탄닌과 산미, 높은 알코올이 느껴지면 이탈리아 네비올로.
진한 노란색의 화이트 와인인데 향이 강하다. 꽃과 향신료, 열대과일 속에 리치 향이 나면 거의 알사스나 독일의 게부르츠트라미너. 입 안에서 산미는 낮고 글리세린 느낌이 나는 것 확인하고.
이렇게 드문 와인들을 예로 드는 건 그만큼 블라인드 테이스팅이 어렵다는 이야기다. 비슷한 향과 구조를 가진 와인이 너무 많기에. 그래서 풍부한 기본 지식이 있어야 하고 체계적인 시음 과정에 따라 선입견 없이 판단해야 한다. 환자를 진단하는 것처럼. 이래서 이건 아니고, 이래서 이것일 가능성이 높고...
그리고 언제나 하우스 박사님의 명언을 잊지 말아야 한다.
"Everybody lies."
무엇이든 절대적으로 믿어선 안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내 감각도. 그래, 진단도 시음도 참 어렵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