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등급과 샤토 피작
와인을 만드는 대부분 나라에 와인 등급 분류가 있어 소비자 선택에 많은 도움을 준다. 이런 와인 등급이 시작된 나라는 당연히 프랑스. 하지만 지역마다 와인의 등급 분류 방법이 아주 다르다.
먼저 피노 누와로 유명한 부르고뉴. 중세 때 수도사들이 구분해 놓은 포도밭이 기준이다. 가장 좋은 포도밭을 그랑 크뤼라 하는데 여기서 재배된 포도로만 만들면 1등급인 그랑크뤼 와인이 되는 것.
그런데 문제가 있다. 아무리 좋은 포도라도 와인을 만드는 사람에 따라 품질이 달라질 텐데 이건 고려사항이 아니다. 그래서 똑같은 등급의 와인이라도 와인 메이커에 따라 가격이 몇 십배 차이가 나기도 한다.
부르고뉴와 함께 프랑스 와인의 양대 산맥인 보르도. 이곳은 좌안 메독과 우안 생테밀리옹이 또 다르다. 역시 프랑스, 뭐든지 복잡하다.
메독 지역은 포도밭이 기준인 부르고뉴와 달리 와인을 만드는 샤토를 기준으로 등급을 정한다. 흔히 5대 샤토라고 하는 라투르, 라피트, 무똥, 마고, 오브리옹 등이 최고 등급인 1등급이다.
여기도 문제가 있다. 근처 안 좋은 포도밭을 사들이면 그곳에서 만든 와인에도 1등급 라벨을 붙일 수 있다. 또한 1855년에 처음 정해진 등급이 그동안 소유주가 수도 없이 바뀌었음에도 지금까지 그대로라는 점도 문제다. (유일한 예외가 1973년 무똥이 1등급으로 승격한 것이다.)
그럼 어떻게 등급을 정하는 게 가장 합리적일까? 포도밭만으로 구분하는 것도, 와인을 만드는 샤토만으로 구분하는 것도 옳지 않을 것이다. 한 번 정한 등급이 전혀 바뀌지 않는 것도 불합리한 것 같고.
가장 최근에(그래도 1955년이다) 등급 체계를 만든 생테밀리옹은 와인의 품질을 직접 평가하고자 했다. 전문가 위원회에서 등급을 정하고 매 10년마다 다시 평가하는 걸로. 가장 이상적으로 보이는 이 방식도 논란에 휩싸인다. 심사위원의 중립성 문제로 법정 소송에 휘말리고 유명 샤토들이 분류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하고.
이런 소동 속에서 질투가 아닌 박수를 받으며 2022년 생테밀리옹 최고 등급인 A등급으로 승격한 샤토가 있다. 샤토 피작. 타계한 소유주 티에리 마농쿠르는 로비와 마케팅을 멀리하고 오직 좋은 와인만을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A등급 승격을 인정한 것도 이런 유산 때문이었고.
엊그제 르꼬르동 블루 현장학습으로 샤토 피작을 방문했다. 티에리의 딸이자 현재 샤토 피작의 공동 소유주인 블랑딘이 투어 담당 직원과 같이 우리를 맞이한다. 전혀 권위적이지 않은 수수한 모습. 샤토 피작 소개를 소개한 후 와인 경력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한 가지 충고를 해준다. 항상 표면적인 것 말고 그 너머에 있는 걸 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우리 학생들 사연을 궁금해한다. 돌아가며 이야기를 하는데, 내 이야기를 특히 재미있어한다. 나중에 책에 실을 사진을 부탁하니 흔쾌히 같이 찍어 준다. A등급으로 승격한 해인 2022년 샤토 피작 18리터 병과 함께.
2022년 와인 레이블에는 티에르의 부인이자 블랑딘의 엄마인 마담 마농쿠르가 직접 쓴 손글씨가 있다.
'우리의 첫 번째 A등급. 기쁨이자 자부심.'
블랑딘이 이야기한 그 너머를 보았다. 샤토 피작의 훌륭한 와인 뒤에는 가족의 사랑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