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과 객관
예전에 나는 인문학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학생 때도 그랬고, 20대 까지도. 좀 시간 낭비라고 느꼈던 것 같다. 전하고 싶은 핵심만 이야기하면 되지 이렇게 길게 쓸 필요가 있나?
이런 내가 책과 친해진 계기는 예비군 훈련. 내과 전문의를 따고 공중보건의로 병역을 마친 거라 서른 살이 한참 넘어서 예비군이 되었다. 1년에 한 번씩 2박 3일간 입소해서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훈련 중 여유 시간이 너무 많았다. 첫 해에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를 가져가서 읽었다. 시간도 잘 가고 너무 재미있었다.
그때부터 독서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우리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한 영향도 있었다. 언제나 난장판이던 집에서 같이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놀라운 일이 생겼다.
예비군 훈련 마지막 해에는 책을 세 권 가지고 갔는데 소설 두 권을 금방 읽어버렸다. 나머지 하나가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군대여서였을까? 지루하다는 느낌 없이 여러 생각을 하며 재미있게 읽었다. 양자 역학과 불확정성 원리에 대해 비교적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는데, 특히 주관과 객관에 대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얼마 전 학교 점심시간에 소피아가 르꼬르동 블루의 와인 테이스팅 방법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너무 주관적이라고. 소믈리에 단체로 유명한 CMS처럼 객관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고. 다들 수긍하는 눈치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조금 불만이었다. 와인 시음을 하며 향을 이야기할 때 맥심 선생님은 '그렇다 아니다'를 명확히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 버섯향이 난다고 하면 '네가 그렇게 느꼈으면 너에겐 그게 맞다'는 식이다. 그런데 우린 나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을 때가 대부분이다. 그럴 때 '맞다' 혹은 '아니다'라고 정확히 말해주면 좋겠는데.
그런데 모두가 동의하는 객관적인 버섯향이라는 게 존재하는 걸까? 그 속에 있는 모든 화학 성분을 분석하는 게 가능할까? 향이란 게 각자의 인식과 기억 없이 존재할 수 있을까?
물론 와인의 향 중에서 정확한 화학 성분이 알려진 것들도 있다. 소비뇽 블랑에서 나는 청피망 향은 피라진 때문이고 오래된 리슬링에서 나는 주유소, 페트롤 향은 TDN이라는 물질이 원인.
하지만 한두 가지 물질로 향을 규정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 와인 향 키트로 유명한 르네 뒤뱅 대표 비바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떻게 향을 구별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는지 물었었다. 하나의 향을 맡으며 떠오르는 생각을 모두 기록하란다. 최대한 구체적으로, 물론 블라인드로.
그땐 몰랐는데 이젠 조금 알 것 같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 남들이 이야기하는 버섯향을 내가 어떻게 인식하는지 알 수 있다. 내 주관적 인식을 명확히 알수록 와인에서 나는 버섯향을 더 잘 잡아낼 수 있고.
우리가 향이라고 부르는 건, 자연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질과 우리의 주관적 인식이 합쳐진 것. 하지만 두 부분으로 분리할 수 있는 단순한 합은 아니다. 언제나 주관과 객관이 아우러져 전체로 존재한다는 사실. 예비군 훈련에서 하이젠베르크가 해준 이야기를 이제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