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중반에 떠나는 파리 유학 35

보르도 체험학습

by 신경한

모두가 기대하던 2박 3일 보르도 와인 여행. 2주 전 스케줄을 발표하며 맥심이 아주 뿌듯해했다. 올핸 학생 수가 적어서 유명 와이너리들이 가능했다고 하며. 내가 봐도 훌륭하다.

포므롤의 샤토 라 플로르 페트루스
생테밀리옹의 샤토 피작
생테스테프의 샤토 코스 데스투르넬
포이악의 샤토 라피트 로쉴드, 샤토 클레르 밀롱
생줄리앙의 샤토 그뤼오 라로즈
마고의 샤토 브랑 캉트냑
그라브의 샤토 오 바이
소테른의 샤토 디캠

처음 방문한 곳은 라 플로르 페트루스. 페트루스와 도미누스를 소유한 장 피에르 무엑스가 처음으로 사들인 포므롤 와이너리라고. 2019년 빈티지를 시음했다. 자두, 체리, 블랙 커런트 등 진한 과일 향이 부드럽게 올라온다. 그리곤 삼나무와 흑연. 초등학교 때 연필을 꽂아 돌리던 연필깎이 생각이 난다. 한 모금 마시니 과일에 쌓인 살짝 조이는 듯한 탄닌이 입안을 꽉 채우고 지속된다. 주먹으로 한 대 얻어맞은 듯 얼얼한데 싫지 않다. 그냥, 좋다.

첫날 점심. 내 디저트를 맥심이 먹는다. 단 걸 싫어하는 나는 맛만 보았고. 전에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디저트를 남겼더니 주인이 깜짝 놀라며 음식에 문제가 있는지 물었다고 하니 맥심이 고개를 끄덕인다. 프랑스에선 음식을 남기는 게 좀 결례라고. 전에 르꼬르동 블루 중국 캠퍼스에 갔었는데 거기는 좀 다른 것 같았다고 말한다. 내가 한국과 중국에서는 음식이 남지 않으면 대접이 좀 부족한 걸로 여긴다고 말하자 페루와 콜롬비아 애들이 정말 놀란다. 동양에서는 음식을 권하면 일단 사양하는 게 예의라고 덧붙이니 말도 안 된다고 소리친다.

저녁엔 보르도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샵인 L'Intendant Grands Vins de Bordeaux에 들렸다. 나선형 계단으로 이루어진 셀러에 보르도 유명 와인이 정말 많다. 제일 비싼 건 페트루스 2000년 12000유로. 지금 환율로 2000만 원이 넘으니 정상적이진 않다. 어떤 맛일지 이젠 조금 상상이 된다. 오늘 방문한 라 플로르 페트루스에 바로 붙어 있고 같은 와인 메이커니까. 그래도 좀 마셔보고 싶긴 하다.

둘째 날 오전은 샤토 라피트. 연구 개발 담당 매니저와 포도밭에서 만났다. 차로 다니며 곳곳을 소개해 주고 나서 자신들이 등대라고 부르는 포도밭에 내렸다. 각각의 포도나무 옆에 QR코드가 있는 막대가 꽂혀 있다. 여기가 자신들의 실험실이란다. 튼튼해 보이는 가지를 꺾꽂이해서 지구온난화에 더 잘 적응하는 품종으로 개량한다고. 그리고 보르도보다 더운 지역인 남부 지중해 품종들도 테스트해 보고 있다고 한다. 등대라. 그게 필요한 캄캄한 밤은 오지 않도록 해야 할 텐데.


샤토 라피트 건물이 리모델링 중이라 시음은 바로 옆의 클레르 밀롱에서. 소유주가 같고 5년 전에 지은 최신식 건물. 20년이 넘은 2003 샤토 라피트를 시음했다. 아주 복합적인 향이 꼬리를 물고 계속 올라온다. 입 안에선 튼튼한 성 같은 구조가 느껴지는데 알코올이 12.5도 밖에 안되어 놀랐다. 부드러운 탄닌이 지속되며 끝없이 이어지는 피니쉬. 아무 음식이 필요 없겠다. 그저 와인만 오래오래 즐기고 싶다.

이번 보르도 체험학습은 건축 예술을 감상하는 느낌도 있었다. 그뤼오 라로즈 지하 셀러는 무어 풍의 기둥과 조명이 참 멋있었다. 오래된 와인이 많이 보관되어 있는데, 거의 200년 가까이 된 1831년 와인은 라벨도 깨끗했다.



브랑 캉트냑의 셀러는 음향을 고려해 벽을 디자인했단다. 실제로 여름에는 이곳에서 콘서트도 한다고.



샤토 오 바이의 새로 지은 셀러는 외부에서 보면 그냥 자연 언덕인 듯하다. 하지만 내부는 그야말로 최첨단. 와인 전문가용 시음실에서 보는 뷰도 정말 멋지고.


마지막 방문지는 샤토 디캠, 세계 최고의 디저트 와인이다. 2016 디캠을 시음하며 마케팅 매니저에게 질문을 했다. 사람들의 취향 변화를 고려해서 당분을 좀 줄일 계획은 없냐고. 지금 밸런스가 완벽하기에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잘라 답한다.

이번에 방문한 보르도 유명 샤토들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대부분 새로 지은 멋진 건물에 최첨단 시설을 갖추고 우리가 최고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었다. 사실 내겐 그게 좀 거품으로 보였다. 시음하면서도 와인이 훌륭하긴 하지만 수십 배, 수백 배의 가치가 있는지는 계속 의문이었다. 불필요한 시설 투자와 마케팅, 그리고 보르도 만의 독특한 도매상 구조 등. 이게 지속 가능한 구조일까? 전 세계적으로 와인 생산 지역은 늘어나고 술 소비는 줄어들고 있는데.

근데 요새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그들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듣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 무엇이 옳은지 따져보는 것보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들만 믿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겐 와인의 품질이나 가성비보다 럭셔리한 이미지가 더 중요할 테니.

꼰대 같은 생각일진 모르지만 난 사람들이 생각하려 하지 않는 게 지금 우리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TV가 처음 나왔을 때도 그런 의견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AI 시대. 사람들이 인간 본연의 사고 능력을 점점 AI에게 의존한다면 어떻게 될까? 유발 하라리의 말이 떠오른다. 이미 도구를 넘어서 행위자가 된 AI. AI가 인간을 대체한다면 인류의 진화인가, 인류의 멸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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