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중반에 떠나는 파리 유학 36

와인 리스트와 그자락

by 신경한

1996년 4월 30일 저녁 7시 제주 공항에 도착했다. 서울대병원 내과 레지던트 2년 차 때. 힘든 병동 주치의를 15개월 연속으로 한 후 제주한라병원 한 달 파견근무를 위해서. 짐을 찾고 공항 밖으로 나오는데 공기가 너무나 맑고 깨끗했다. 숨을 한번 들여 마셨다. 내 온몸이 상쾌해지는 듯.

내가 제주에 자리 잡게 된 건 그때 그 깨끗한 공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 제주를 정말 사랑하게 되었다. 자연환경은 말할 것도 없고 토속 음식과 술도 좋아하게 되었고. 제주 사투리도 조금 흉내 내었는데, 내가 특히 좋아하는 말이 있다. 그자락. '대강 그 정도'의 의미인데 이게 맥락에 따라 조금씩 어감이 다르다. 내가 주로 쓰는 건 '그자락은 아니주게.(그 정도까진 아니지)' 또는 '그자락?(그렇게까지)'.

오늘 학교에서 와인 리스트 강의를 듣다가 이 말이 생각났다. 레스토랑의 와인 리스트를 만드는 건 소믈리에의 중요한 일 중 하나. 수많은 와인들 중 그 레스토랑에 맞는 와인을 골라 가격을 정하고 손님이 보기 좋게 리스트를 제작해야 한다.

맨 처음 결정해야 할 건 얼마나 많은 와인을 리스트에 담을 것인지. 맥심이 슬라이드 한 장을 보여준다. 라투르 다르장이라는 파리 레스토랑의 와인 리스트. 14,000 종류 이상의 와인이 있는 거의 백과사전 수준. 어떤지 묻는다.

속으로 대답했다. '그자락?'

이런 와인 리스트를 만드는 주된 이유를 묻는다. 다들 평판을 떠올리는데 맥심은 아니란다. 이런 와인 리스트를 받으면 대부분의 고객은 조금 보다가 포기한단다. 추천을 부탁하도록 만들어 소믈리에가 선택권을 갖도록 하는 것.

그리고 현실적인 강의가 이어진다.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보통 음료 매출이 요리의 60-80% 정도란다. 와인은 요리에 비해 쉽게 매출을 올릴 수 있으므로 더 집중해야 한다고. 음식 가격이 1인당 50유로 정도인 레스토랑에 4명 손님이라면 총 200유로. 화이트, 레드 한 병씩 마실 것 같으면 80-100유로 가격대의 와인을 먼저 추천하라고.

와인 리스트 작성법을 What I need, can, want로 나누어 설명한다. Need는 손님들이 많이 찾는, 꼭 필요하고 필수적인 것. Can은 고가 와인. 비싼 와인을 찾는 손님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고. Want는 내가 좋아하는 와인. 그래야 일이 즐겁다고.

와인 리스트를 만들고 가격을 정하는 건 소믈리에로서 고객 만족과 식당의 이익이라는 어찌 보면 상충되는 두 가지 가치를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대하는 모든 직업이 그럴 것이다. 사실 의사가 환자를 대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환자의 건강과 병원 경영 모두를 추구해야 하기에.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사는 일 자체가 상충되는 가치 속에서 균형 잡는 일인 듯하다. 워라밸도 그렇고. 내일을 준비하면서 현재를 즐겨야 하는 것도 그렇고. 의미 있는 삶과 재미 있는 삶의 균형도 그렇고.

삶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한쪽으로 치우치기 시작하면 관성 때문에 계속 그쪽으로 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 그럴 때 이 말이 필요하다.

"워워. 그자락은 아니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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