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이 처음은 아닌데. 새삼스레 낯을 가리고 어색해할 사이도 한참 지난 것 같은데. 이번엔 뭔가 다른 느낌이에요.
작은 화분에 선인장을 키워본 적 있어요. 손을 타지 않고 쑥쑥 자라는 게 신기했어요. 양지바른 곳에 꺼내 두고, 물을 줬다는 사실을 까먹을 즈음 한두 번 관수한 게 전부였는데도요. 저들은 어찌 적은 애정만 기울여도 생그러운 녹빛을 띠는지. 무더운 여름엔 납작하고 새빨간 꽃을 피워 깜짝 놀라게 하기도 하더라니까요. 갸륵한 마음에 동그란 줄기 마디 마디가 말랑하고 포근하게 느껴졌어요. 삐죽삐죽 심술이 돋은 가시마저도 귀엽게 보였죠.
당신이 관심을 주지 않아도 홀로 마음을 키우는 나 역시 귀엽게 보일까요? 섣불리 다가가지는 못하고 집에 틀어박혀 봄옷만 주문해요. 별다른 약속도 없으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당신 근처를 지나갈 일이라도 있으면 그날 아침엔 마음에 드는 옷을 찾을 때까지 계속 갈아입어요. 어때요, 이목을 끌고자 말없이 꽃으로 단장하던 소심한 선인장과 닮아 있나요?
이런 내 모습이 겉보기엔 말랑하고 평온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실은 하루하루가 생존이에요. 당신의 메마른 무관심 속에서도 이따금 보내주는 한 모금 애정으로 간신히 목만 축이고 살아가요.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사랑을 갈구해요. 당신의 눈에 띄기 위해 꽃이라도 피우려면 살갗을 찢는 아픔을 감내해야 하죠. 그런 마음을 품고 살면 가시에 찔린 듯 쓰라려요.
아무리 생각해도 짝사랑은 설렘이라기보단 고통이에요. 당신은 상상할 수 있나요? 상대는 사랑을 주지도 않는데 알아서 자라나는 마음을요. 세상에는 그런 마음도 있어요. 그런 아픈 마음을 소중히 가지고 살아가는 삶도 있더군요.
힘든 나날을 견디다 보면 당신께 당장이라도 고백하고 싶어져요. 하지만 그래선 안 되죠. 알아요, 저도 안다구요. 사랑은 얼마나 세련되게 들키느냐가 관건이란 걸. 뭐든 포장이 중요하죠. 귀여운 무당벌레도 빨간 점 감추면 시커먼 바퀴벌레로 보일걸요? 내 마음이 그저 그런 흑심으로 오해받기 싫어요.
그래서 핑계를 지어냈어요. 갑작스러운 연락엔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특히나 아직 데면데면한 우리 사이엔. 떨리는 마음은 예의 차린 말투 뒤에 숨겼어요. 시간이 지나면 금방 들켜버릴 어설픈 위장이었지만, 지금은 곤란해요. 천천히, 놀라지 않게 조금씩 보여줘야 하죠.
당신을 만나기 전날엔 잠도 못 자고 새벽 내내 생각해요. 당신도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선뜻 잡은 약속이 당신의 관심을 뜻하는 건 아닐까. 기대를 마음껏 부풀리다 보면 펑하고 터지는 순간이 있어요. 그럴 땐 별안간 불길한 예감이 밀려와요. 혹여나 갑작스러운 연락이 불편하진 않았을지. 왜, 그런 상황 있잖아요. 어색하고 거리감 느껴지는 사이엔 거절도 어려우니까. 이번 약속도 그래서 승낙한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건 좀 싫은데. 부담스러워 만남을 망설이는 장면을 떠올려요. 당신의 무덤덤한 표정 위로 찌푸린 미간이 보이는 듯해요. 위스키를 들이킨 것처럼 속이 차갑게 화끈대는 느낌이에요.
당신을 만난 뒤에는 당신의 행동 하나하나, 말투와 어조까지 이리저리 곱씹어요. 혹시나 당신도 날 좋아한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아무리 해석하려 애를 써봐도 소용없어요. 당신의 반짝이는 눈빛이 내게만 보이는 건지, 느릿한 걸음이 망설임과 설렘 중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요. 살며시 입을 가린 그 웃음이 무슨 의미인지도 알지 못하는걸요. 답답한 마음에 휴대폰을 열어요. 지난 밤 나눴던 대화를 읽으면 훼손된 경전을 복원하는 기분이에요. 숨겨진 의미가 있을까 작은 단어 하나, 사소한 이모티콘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고 이따금 실망하죠.
고민하고 곱씹을수록 단 한 가지 사실만 명확해져요. 이렇게 기억을 되감는 걸 보니, 내가 당신을 정말 좋아하고 있나봐. 바닥이 울렁거려 마음의 균형을 잡을 수 없어요. 입에 시큼한 쓴맛이 올라와요. 벽을 짚고 고개를 숙이면 금방이라도 속을 게워낼 것만 같아요. 아직 제대로 된 데이트 한 번 한 적 없는데, 함께한 하루만 계속 되뇌는 내가 좀 느끼하고 징그럽나요?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아요.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고 베개를 몇 번이나 고쳐 베어요. 나도 내가 왜 이렇게 부담을 느끼는지, 어디에 넋을 빼앗겼는지 당최 모르겠어요. 이대로는 안 되겠어. 이불을 걷어내고 거실로 나와 빈 책상에 앉아 있어요. 꺼진 TV 한쪽 구석에서 붉은 점이 깜빡, 점멸하는 게 보여요. 불빛을 따라 네 모습도 깜빡, 깜빡.
겁먹고 쪼그라든 내 마음을 어쩌면 좋을까요. 가슴에 창을 내어 상해버린 마음을 꺼내고 싶어요. 그럴 수 있다면 맑은 물에 씻어 옥상에 널어두겠죠. 봄볕에 잘 말린 마음 한 토막을 당신께 건넬 텐데요. 부담스럽지 않게, 적당한 크기로. 그럴 수 없어 발만 동동 굴러요.
누가 그랬던가요? 가슴에 꽃 한 송이 품고 있으면 설한도 봄처럼 느껴진대요. 제 기분은 정반대랍니다. 창밖엔 벚꽃이 만개해 있어요. 어딜 가든 만연한 봄인데, 맘속에 자라난 선인장 때문에 봄날도 황무지 같아요. 고작 짝사랑인데, 내가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나요? 사소한 찰나 하나하나 곱씹다 체한 내 모습이 어리석어 보이시나요?
요즘엔 도통 무엇에도 집중하지 못해요. 답답한 마음에 친구한테 전화를 걸었어요. 한참 듣더니, 무심하게 좋을 때다, 그러더군요. 방법이 있나.. 좋아하는 사람이 참아야지, 라고도 하네요. 그게 아니라고 마구 따졌지만 속으론 인정했어요. 어디 내가 재촉해서 될 일인가요. 당신이 먼저 꼬신 것도 아닌데. 답답하고 억울하지만, 천천히 당신의 속도에 맞추는 수밖에 없겠죠.
마음이 조급해질 때마다 망한 사랑의 기억을 회상한답니다. 설레는 마음을 못 이겨 무턱대고 다가간 적, 확신 없이 고백한 적, 반대로 누군가 내게 부담스럽게 다가와 멀리 밀어낸 적. 그런 기억으로 마음을 다잡아요. 분명히 당신 때문인 것 같은데 당신 탓도 못 하고.
가끔은 이런 상상을 해요. 지금 당장 운석이라도 떨어져서 세상이 멸망한다면 좋겠어요. 뉴스에선 지구 종말 디데이를 세고 있을 거예요. 10, 9, 8.. 사람들은 우왕좌왕 혼란스러워지겠죠. 7, 6, 5..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4, 3, 2.. 그렇다면 난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 사실 나 너 좋아해, 말할 수 있을 텐데. 앞뒤 재지 않고 충분히 용감하게. 그때가 되면 당신은 내 마음을 받아줄까요? 내가 어디 가서 자신 없어하는 타입은 아닌데. 당신을 좋아하는 마음이 찰랑찰랑 차올라 넘칠 것 같아요. 그래서 당신 앞에만 서면 이렇게 겁먹게 된답니다.
당신이 언젠가 이 글을 읽게 될까요. 글을 읽으니 어떤가요. 아무리 봐도 평소보다 조금 서툴게 쓴 것 같아요. 영글지 못한 마음으로는 문장이 잘 써지지 않죠. 커다란 감정을 다 담아내기엔 페이지가 부족한 것 같네요. 몸이 베베 꼬일 만큼 들키기 싫은데, 또 한편으론 부디 들통났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그런 애매한 마음으로 이렇게 애매한 글을 써요. 편지도 아니고, 독백도 아니고, 어쩌면 방백에 가까운 글. 관객만 들을 수 있고, 정작 주인공인 당신은 듣지 못하는 대사 같은 것.
생각해 보니 난 아직 당신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요. 난 당신을 아주 구체적으로 사랑하고 싶은데. 네 내면의 이경(異景)까지 전부 다 알고 싶은데. 사소한 것들을 하나씩 알아가다 보면, 지금처럼 막연하고 흐릿한 글도 조금은 또렷한 모양을 갖게 될까요? 지구가 멸망하지 않더라도 네게 자신있게 고백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