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자퇴생, 아프기 시작하다 #2

섭식장애, 신경성 식욕 부진증

by 됐거든


과학고에서 가장 먼저 나를 아프게 한 것은 허리였다.


근육통이든 디스크든 아니면 심인성이든 허리가 아파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일단 요통이 있으면 앉아있을 수가 없다. 수업과 자습이 이어지는 과학고의 생활에서 이건 치명적이었다. 그때 우리는 아침 6시쯤 일어나서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아침 식사를 한 다음, 8시쯤 0교시를 했다. 오후 3-4시까지 수업이 있었을 것이고 저녁 11시쯤까지 독서동에서 자습을 했다. (시간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늦은 밤까지였던 건 분명하다, 그 시절 모든 고등학생이 그러했듯이.) 건물과 건물 사이 이동하는 그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앉아있어야 했는데 나는 그게 되지 않는 것이다. 앉아있는 게 불편해지면 서서 수업을 듣거나 책을 봤는데 그게 계속되니 목과 다리가 아팠다. 그리고 솔직히 그렇게 해서 책을 보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가 원하는 만큼 공부를 할 수 없게 되니 애가 타면서 짜증이 났고 그게 계속 이어졌었다.


이전에 썼듯이, 이놈의 요통으로 나는 1학기 중간고사 마지막 날 결시를 하게 됐다. 그 쟁쟁한 학교에서 시험을 빠지다니 어린 마음에 그게 무섭고 불안했다. 그래서 며칠 사이 살이 제법 빠졌다. 그때 정형외과에 잠깐 입원했다가 퇴원했는데, 학교로 돌아오고서도 한동안 빠진 체중이 유지됐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서서히 몸무게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어렸을 때 살집이 있는 편이었다. 초등학교 때 생활기록부를 보면, 항상 2-300g 차이로 과체중을 피해 다녔으니까. (초등학교 때 몸무게가 지금보다 많이 나간다.ㅠ) 그러다가 허리가 아프면서 우연히 다이어트가 되었고 내 인생에서 처음 경험하는 몸무게가 된 것이다! 아픈 건 속상했지만 살이 빠진 건 좋았다. 그게 과학고 때문인 걸 알았지만, 한편으로는 과학고가 나에게 준 선물 같기도 했다. 마음은 힘들지만 대신 이런 몸을 갖게 되지 않았나. 내가 날씬한 사람이 되다니, 약간 감격스러웠다. 그러면서 점차 나는 몸무게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똑똑한데, 나는 한 살 어린 데다가 검정고시 출신이란 게 늘 부끄러웠고, 월반을 했니 뭐니 해도 나 스스로는 기초가 부족한 걸 알고 있는 그런 상황에서 줄어든 몸무게는 마치 뭐랄까 나의 성취 같았달까. 남들만큼 책상 앞에 앉아있지도 못해서 왠지 뒤처지는 것 같고 뜻대로 되는 게 없는 것 같은 이 과학고에서 ‘날씬함’만이라도 유지해보고 싶었다. 그게 내 능력, 자기 관리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식사량이 서서히 줄어갔고 나는 최대한 먹지 않으려 노력했다. 돌이켜보니 섭식장애였던 것 같다.


섭식장애는 몇 종류로 나뉜다. 신경성 식욕 부진증과 신경성 과식증(제거형, 비제거형)이 있는데, 음식 섭취를 극단적으로 제한하여 그 결과 저체중이 되는 경우가 신경성 식욕부진증에 속한다. 신경성 과식증은 폭식을 동반한다는 특징이 있는데 제거형에는 폭식 후 이 열량을 소모하기 위해 구토, 하제 복용 등 부적절한 보상행위가 있고 비제거형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 다르다*.


나는 비교적 경증의 신경성 식욕 부진증이었던 것 같다. 완전히 곡기를 끊는 건 아닌, 생활은 가능했던 정도. 그렇다고 괜찮았다는 건 아니다. 그 시절 학교에 있는 월-금요일 동안 두 끼는 제대로 먹었을까. 학교 식당에 가기는 했어도 정말 조금만 먹고 버려서 그걸 다 합치면 얼마 되지 않았다. 먹는 양이 줄어드니 자연히 힘은 없고, 허리는 더 아픈 것 같고, 그러면서 점점 수업에 빠지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중에는 허리가 아파서 못 앉아있는 것인지 기력이 없어서 앉아있지 못한 것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과학고를 나오고서도 20대 초반까지는 체중에 신경을 썼다. 그러다가 21살 때였나. 그때는 기초대사량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해 여름, 아이스크림이 너무 먹고 싶어서 며칠 월드콘을 1개씩 먹었는데 와우! 정말이지 살이 찌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내가 더 나이 들어서까지 아이스크림 하나를 마음 편히 못 먹고살면 그건 너무 슬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체중에 대해 조금 너그러워졌고, 운동을 시작했다. 무엇보다 살이 조금 쪄도 괜찮다는 생각을 암기하듯 지속했다. 정말로 괜찮아지기까지는 몇 년이 더 흘러야 했지만.


시간이 흘러 의전원 실습 때 섭식장애로 입원한 환자 두 명을 보았다. 소화기내과와 신장내과 실습 때였다. 10대 후반과 20대 초반 여자 환자. 소화기 내과 환자는 식욕 부진이 있어 원인을 찾아보려고 내시경을 하기 위해 입원했다고 했다. 결과는 이상 무. 교수님께서 “네가 요즘 힘든 일이 있구나.”로 시작하시면서 정신과 치료를 권하셨다. 그러나 환자 본인도, 그 옆의 어머니도 영 받아들이지 못하는 눈치였다. 나의 과학고가 겹쳐졌다. 신장 내과 환자는 섭식장애가 훨씬 더 많이 진행된 케이스였다. 언뜻 보기에도 30kg 대의 체중, 탄력 없는 피부, 푸석한 머릿결. 음식 섭취를 끊은 지 꽤 되었고 탈수를 시켜 체중을 줄이려고 변비약이며 이뇨제를 남용한 결과 젊은 나이에 이미 신기능이 떨어진 상태였다. 입원 중에도 2시간마다 체중을 확인했고, 투여받는 수액의 양을 기록한 뒤 자기 체중 변화와 비교하곤 했다. 짐작컨대, 체중계 숫자가 올라가는 순간 그 사람의 자존감은 바닥을 쳤으리라.


최근 나의 자퇴기를 쓰면서, 만약 그때 정신과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 비슷했더라면 내 10대가 어땠을까 자주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20년 전인 그때는 정신과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 많이 달랐고, 찾아가고 싶어도 병원이 드물었던 것 같다. 지금은 정신건강의학과가 거의 동네마다 있고, 소아청소년만 전문으로 보는 병원들도 있는 반면에 말이다. 나의 사춘기를 그저 참기만 하면서 지내왔는데 지금 보니 다 답이 나와 있는 문제들이었고, 치료를 받았더라면 어쩌면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일들이었다. 지금과 같은 환경이었더라면 내가 덜 힘들지 않았을까, 내 가족을 덜 괴롭히지 않았을까, 2002년이 좀 더 밝게 기억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 조금 아쉽다.


실습 때 만났던 저 두 친구는 잘 치료받았으리라 믿어본다. 그들은 나보다 10년 뒤에 겪었으니까.



http://www.snuh.org/health/nMedInfo/nView.do?category=DIS&medid=AA000706


==========


커버이미지: Notepaper with the word anorexia on a white plate. Eating disorder and unhealthy nutrition 이미지 (1423931964) - 게티이미지뱅크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자퇴생, 학교에 적응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