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을 채우는 인간에서 여백을 만드는 사람으로

by 윤해



2023.12.04

넉넉한 마음에 정난다. 정을 주고 정을 내는 품은 단순하지가 않다. 있다고 정 내는 것이 아니고 없다고 정을 못 내지도 않는데 정을 주고 정을 받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늘 살얼음판으로 뒤덮인 빙판길이기가 쉽다. 일희일비하면서 인간의 마음을 훔치는 감정도둑의 정체는 무엇일까?

후성유전학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생태학 법칙을 충실히 수행하는 유한한 생명이다. 유한한 육체를 입고 있는 존재로서의 우리는 살아가면서 만나고 헤어지는 기쁨과 고통 속에서 인간으로서 경험하는 가치관으로 우리의 여백을 차곡차곡 챙겨 놓는다. 그 가치관이라는 것이 일견 보면 자유로운 것 같아도 먹고살아야 하는 생계형 인간이라는 한계에 직면하다 보면 살면서 여백을 채우며 변화하는 가치관마저도 자유롭기는커녕 점점 더 오그라 들고 쪼그라드는 구속사적 가치관으로 경도되기가 쉽다.

여백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가 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세상이 필요한 인재로 성장하는 과정은 금속공학의 주조공정, 캐스팅과 유사하다. 인생이란 연극무대에 각자 맡은 바 배역을 정해 적합한 배우를 섭외하는 것을 캐스팅한다고 하는 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생계형 인간으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꿈과 목표는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가 채우는 여백을 완성하는 주조틀, 주형과도 같은 것이다. 일단 정해진 주형이 정해지면 원하는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용융하고 교반 하여 적절한 물성을 얻기 위해 첨가제를 넣고 형틀에 붓고 식히는 과정을 반복한다.

우리도 세상에 와서 생존하기 위해 부단하게 우리를 단련하고 정련하여 우리가 가진 여백에 부어 넣고 그 여백을 꿈과 희망이라는 고정관념의 틀로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교육과 공부라는 이름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고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는 길을 잃고 반문해 본다 우리는 고정관념이라는 틀에 여백을 채우기 위해 사느냐 아니면 구속사적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분투노력하면서 여백의 틀을 수시로 재창조하면서 여백을 만들어 가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반드시 온다.

관성적 존재로서의 우리는 이성과 감정이라는 생체의 길항작용으로 살아간다. 바늘 가는 데 실가고 , 마음 가는데 몸이 가며 마음도 내고 정도 주는 것이다.
이성이 백주대낮의 칼날 같은 사실이라면 감정은 은은한 달밤에 배어 나오는 연민과 회한의 끄터머리 같은 것은 아닐까?

우리는 생계를 위해 칼날 같은 이성으로 만나는 상대를 재단한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을 기점으로 허물허물해지고 허당기가 가득 찬 낯선 모습의 자신과 대면할 때가 있다. 생계를 위해 면도칼과 같은 정밀함과 조리 정연함으로 자신의 여백을 채웠던 나에서 숭숭 구멍이 뜛리고 허점 투성이로 변해가는 나로 변해가면서 여백을 채우는 삶에서 여백을 만드는 생뚱한 행동을 하는 나에게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하고 당황해서 허둥대기도 한다. 그러나 놀라지 마시라 드디어 나는 생계형 인간이라는 세상에서 빠져나오는 출세가도에 접어든 줄은 미처 짐작도 못하는 것이다.

출세, 정확히 말하면 생계형 세상에서 빠져나와 사계가 분명한 계절을 알고 철의 변화를 느끼는 자연 안의 사람으로 탈바꿈되는 그야말로 여백을 만들어 내고 자연과 호흡하고 겨루고 뒹굴고 혼연일체가 되는 허당을 넘어 허세를 부릴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고 오른쪽과 왼쪽을 알고, 동과 서를 알고 남과 북을 알며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아는 것이 사람으로 갖추어야 할 알파요 오메가이다. 때를 알고 시를 맞춰 세상 속을 빠져나와 여백을 채우는 인간에서 여백을 만들고 마음을 내고 정을 주는 허당 가득한 사람이 될 수 있을 때 그는 출세라는 것을 했다고 어깨를 펴고 말할 수 있는 허세 가득한 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인간은 이간하고 사람은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