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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걸음만 해도 신발은 닳는다

by 윤해


2024.01.20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듣는 기분 좋은 말 중에 하나가 " 저 사람은 구김살이 없어"라는 말이 아닐까?

구김살이 없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 무슨 사람을 다리미로 다린 것도 아닐 텐데 구김살이 없이 매끈하다는 말도 아닐 테고 되짚어 봐서 사람이 옷감도 아닌데 어떻게 구겨진다는 말일까?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다는 의미는 우주의 삼라만상처럼 저마다 다른 모습 다른 환경에서 다른 사건들을 마주하며 다른 시간에 살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지구에 왔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전자의 다양한 조합만큼이나 다채로운 능력을 가진 우리를 세상은 편의를 위해 일반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압박을 하며 궁극적으로는 세상이라는 틀 안에 우리를 가둔다.

그것이 세상이 심어준 고정관념이던 자기가 걸어간 자발적 선택이던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우리 고유의 색깔을 지니고 있던 옷감이 세상이라는 틀 안에 들어가느라 구겨지고 심지어는 찢겨지기까지 한다는 사실이다.

300 년간 근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성장한 서구 선진국에 비하여 수십 년간 압축성장을 통해 중진국의 함정을 넘어 선진국 문턱에 가까스로 다다른 우리 대한민국은 어떤 구김살이 우리를 위축시켰으며 이 구김살을 어떻게 펴는가가 우리의 미래를 밝게도 어둡게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먼저 압축성장 자체가 지향하는 철학이 극강의 가성비이다. 투입 대비 성과라는 가성비 개념이 단순히 경제성장과 같은 부국의 영역뿐만 아니라 생활전반 행동 하나하나 마다 배어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이다.

이를테면 잘하지 않으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는 고집이 저마다 마음의 구김살이 되어 우리들의 행동을 막고 있다. 노래를 불러도 가수처럼, 운동을 해도 선수처럼 공부를 해도 천재처럼 이미 모든 능력을 타고난 사람처럼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이 우리가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도전을 저해하고 있다.

미국 여행 중에 테니스를 칠 일이 있어 미국대학 캠퍼스에 있는 테니스장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마침 다른 테니스코트에서 열심히 테니스를 치는 미국인을 보고 순간 당황했다. 그들의 스트로그 스윙, 테니스채를 휘두르는 모습이 한국에서 보던 테니스 동호인들과는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마치 파리채를 휘두르는 느낌, 잘 봐줘서 배드민턴채를 휘두르듯이 정형화된 테니스 스트로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폼에 아랑곳하지 않고 네트에 공이 자주 걸려 게임이 매끄럽게 흘러가지 않아도 전혀 개의치 않고 테니스라는 운동 자체를 즐기고 있는 모습에서 나는 솔직히 문화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골프를 치던 테니스를 하던 노래를 부르던 공부를 하던 혼자 만의 연습과정이라는 피할 수 없는 단계를 거친 후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후 무엇인가를 하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해서 무엇을 하든지 보기 좋고 듣기 좋은 상태가 아니면 좀처럼 어딘가에 도전하는 것을 굉장히 주저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즉 실력이 없는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한다는 자체를 망신이라고 생각하는 가성비 문화 때문에 보다 다채로운 자기의 잠재력을 알아 나가고 나아가 미약하게 시작하여 창대하게 끝나는 생의 섭리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패착을 두는 경향이 아주 농후한 사회이다.

완벽은 시작이나 결과가 완벽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며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허황된 말이다. 오히려 갖가지 기회와 도전을 하기에 완벽한 여백을 가진 존재로서 완벽하게 태어났다는 말에 가깝다. 이 말을 오해하여 존재할 수 없는 상태나 결과의 완벽만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몰리게 된다.

인생은 제자리 뛰기만 해도 신발이 닳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해가 가고 달이 가면 우리가 그 신을 신고 지구를 몇 바퀴 돌던지 아니면 제자리에서 완벽할 때를 기다리며 시도조차 하지 않고 제자리걸음만 하더라도 우리가 신고 있는 새신은 똑같이 닳는다는 사실만 알아도 우리는 인생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는 데 있어 많이 편해지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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