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23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론으로 한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해석하곤 했다. 그리고 조금만 시간을 두고 세상을 보면 이 세상이 그렇게 정적인 정의에 휘둘리지는 않는 다이내믹하게 엎치락뒤치락하는 난장판의 한가운데 있음을 절감한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을 이해하고자 한다.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자기 나름의 툴(tool)을 활용하여 자기만의 틀을 만들어 그 틀 안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현상을 가두고 자기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그 해석된 세상을 자기 인식범위 안에 넣어 세상을 이해하면서 세상의 부조리에는 성토를, 세상의 순리에는 맹목적 공감을 하는 것이다.
세상은 과거의 토대 위에 현재가 서 있고 그 토대로 인하여 차별과 구별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그것은 인간이 공간 속에서 시간을 사는 존재이므로 이 시공간을 사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그러므로 차별에 대한 반동인 평등도 순간의 개념으로 보면 차별인 셈이고 시간을 늘려보면 차별이 곧 평등인 셈이다. 이처럼 당대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반복되는 것 같아도 시간을 확장해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곳이 인간이 사는 세상의 역사 아닐까?
동서양의 역사만 해도 보다 더 아쉬운 쪽이 굴을 파고 현상을 타개하기 위한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국가들의 부침이 셀 수 없이 일어나는 현장이다. 서양 문명이 따뜻하고 온화한 지중해에서 꽃피고 음습하고 추운 갈리아 지방을 거쳐 북유럽으로 전파되는 사이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내적결핍으로 몸서리치면서 힘을 키운 게르만족에 의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이처럼 역사의 변곡점은 내재된 내적결핍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용암이 분출하듯 활화산처럼 폭발하여 순식간에 주변을 화산재로 덮고 기존의 문명을 지층화시킨다. 지층으로 변한 문명은 곧 잊혀버리고 화산재의 비옥한 토양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명이 건설되는 것이 시공간을 다이내믹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운명이요 세상의 역사다.
우리가 사는 유라시아 대륙만 해도 13세기 칭기즈칸의 말발굽아래 잠시 잠깐 세계화의 맛을 본 유럽인들이 몽골제국이 해체되면서 중동에 자리 잡은 오스만 튀르크제국에 의해 동서양의 교역이 끊어짐에 따라 아쉬울 것 없던 동양은 그들만의 평화로운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을 때 음습하고 추운 변방의 유럽은 주었다가 사라진 향신료 등 동양의 물자에 대한 내적 결핍에 몸서리치면서 기어이 그대 그리고 나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푸른 파도를 가르는 흰돛단 배, 범선을 대서양에 띄우는 대항해 시대를 활짝 열어젖히고 동양을 발아래 두는 문명사적 역전을 이루어 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때 뒤집힌 동서양의 역전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역사가 그러했듯이 재역전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다만 나나 나라나 국가나 대륙이나 역전의 불쏘시개는 내적결핍이다. 내적 결핍에 몸서리치지 않는 문명의 역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 세대 만에 민둥산을 산림이 우거진 푸른 산으로 녹화한 우리나라의 저력도 결국 부모는 우물물에 간장 태워 마시며 허기를 달래면서 아들은 배급 강냉이 빵이라도 먹이려는 흙수저 국가가 몸서리치게 겪은 내적결핍의 결과라는 것을 직시할 때, 푸른 파도를 가르며 대서양뿐만 아니라 오대양 육대주를 좁다고 뛰어다닌 조국 근대화의 숨겨진 영웅들의 노고에 조금이라도 공감할 때, 우리는 어떤 사람 어떤 나라가 내적결핍에 몸서리치다가 이대로 살 수는 없다고 분연히 일어난 그대 그리고 나라는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나라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