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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닫고 여는 가에 따라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by 윤해


2024.01.31


살고 죽는 생사의 반복이 우주적 질서임에는 분명한데 자연을 떠나 가상세계로서 문명을 건설하여 세상을 만들고 세상 속에 인간으로 살아가다 보면 인간의 잣대로 길흉화복을 논하고 신을 만들어 선악관을 주입시키면서 생사의 반복이라는 우주적 질서를 왜곡하면서 밤낮과 생사를 뒤 바꾸다가 어느 순간 삶만이 존재하고 죽음은 거론하기 싫어하는 터부이자 망각 속에 묻히는 존재가 되었다.


우주적 질서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는 우리 몸에 비해 온갖 세상 속의 가치관과 선악관에 물들어야 살 수 있는 머리는 생존을 최우선으로 두고 죽을 때까지 합목적적 선택을 하면서 외부환경에 대해 수용과 도피반응이라는 우주적 질서에 따라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면서 죽음을 애써 부정하고 살아가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는 것이다.


우주적 질서로 살아가는 우리 몸을 최소단위로 분해하여 미립계까지 파고들면 결국 남는 것은 전자가 원자핵을 무질서하게 돌면서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는 미립자의 세계를 만난다. 이 미립자가 세포를 이루고 헤아릴 수도 없는 세포가 모여 서로가 필요할 때는 열려서 에너지와 물질을 교환하고 개체의 외부환경과는 피부장벽을 사이에 두고 열고 닫기를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우주적 질서에 따라 자연스러운 흐름을 보이는 우리 몸은 세상의 길흉화복이라는 고정관념과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따라 반응하는 머리의 생존본능과는 열고 닫음의 기전이 확연히 구분된다.

즉 여기에서 무엇에 열고 무엇에 닫히는 기준 자체가 우주적 질서와 세상의 기준이 다른 것은 마치 생과 사를 반복하는 우주적 질서가 생존만을 최우선으로 두는 세상의 법칙과는 다른 이치와 같다.


파자소암(婆子燒菴)의 화두도 자연의 물리적 법칙에 가장 가까운 종교인 불교가 추구하는 해탈의 경지가 세상 속을 사는 인간의 도리와 법칙만을 생각하면 평생 30년을 시봉한 노파의 딸을 밀쳐내는 것이 인간적 도리라 한편 생각하겠지만 억겁의 인연으로 만난 노파의 미모의 딸이 하늘거리는 비단 속옷만 걸치고 스님의 무릎에 살며시 앉으면서 스님과 미모의 딸사이에 경계를 묻는 것은 이미 남녀의 경계는 사라지고 음양이 중에 들어 합할 일만 생겼다는 염화시중, 불립문자 이거늘 억겁의 인연이라는 우주적 섭리를 무시하고 세상 속의 인간의 도리에 갇혀 있으니 30년 시봉한 노파가 버럭 화를 내며 억겁의 인연을 끊고 암자를 불태우는 것은 당연지사인 것 같다.


한국불교 최고의 고승 원효대사도 요석공주와의 억겁의 인연이라는 우주적 질서에 따라 이두를 만든 설총이라는 생명줄을 이어간 것을 보면 해탈이라는 것은 비록 우리가 사는 동안 세상 속, 즉 세속에 있지만 우리가 돌려야 할 억겁이라는 생사의 순환 속에 한 점에 불과하고 사는 동안 뒤집어쓰고 있는 인간의 탈보다는 억겁의 시간을 증거 하는 우주적 섭리에 순응하는 것이 바로 해탈이요 득도임을 30년을 시봉한 노파도 알거늘 해탈과 득도가 눈앞에 있음을 알지 못하며 "찬 바위가 마른 고목을 의지하니 삼동에 온기가 없구나”라는 우주적 섭리를 내치는 스님의 법문을 듣고 파자소암(婆子燒菴)을 한 노파의 결기가 예사롭지 않으며 우리의 삶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것도 사는 동안 고난 속에서도 일상을 통해 득도하고 생과 사의 우주적 질서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실행한 자랑스러운 노파와 같은 어머니가 면면히 이어온 나라요 민족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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