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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서 아는 표음문자, 깨달아 아는 표의문자

by 윤해



2024.07.07

문명의 알파요 오메가는 당연히 문자다.

문자는 인간을 인간답게 나아가 사람답게 만든 유일무이한 도구다.
인간의 의사소통 도구로 말과 글이 있지만 말과 글 중에서 글로 표현되는 문자의 발명은 단연코 문명의 꽃이다.

우리가 태어나서 옹아리를 수없이 반복하다가 돌이 지날 무렵 겨우 엄마나 알아들을 수 있는 단음절의 단어를 애기가 말하면 집안에는 신기함과 대견함으로 웃음꽃이 만발한다. 그렇게 부모의 칭찬과 과도한 리엑션에 고무되어 여백의 뇌를 가지고 태어난 애기는 말 그대로 사랑의 기를 듬뿍 안고 하루가 다르게 말을 배워 어느덧 얄미운 미운 일곱 살이 되면서 세상 말은 다 아는 것처럼 재잘거리며 한껏 자기를 뽐내고 할아버지 무릎을 베고 앉아 조부의 수염까지 뽑을 기세로 재치 있는 거짓말도 거침없이 하면서 집안의 독불장군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악동이 몰랐던 사실이 있다. 거침없던 물살이 낭떠러지를 만나 폭포처럼 천길 절벽 밑으로 떨어진다는 자연의 섭리는 꿈에도 몰랐을 테니 말이다.

가정의 원톱으로 군림하던 코 흘리개가 8살이 되면 자연의 섭리에서 세상의 원리를 알아나가고 문자를 배우기 위해 학교로 간다. 가나다부터 배우는 문자는 그 악동이 집안에서 거침없는 격려와 감탄과 주인공으로서 배웠던 말과는 차원이 다름을 느끼며 급격하게 의기소침해지며 겸손모드로 진입하지 않을 수없는 학교에서의 생활은 그 악동에게서는 아마 시련의 연속일 것이다.

시련과 단련 속에서 어찌어찌 가나다를 거쳐 받아쓰기에 이어 글짓기까지 나아갈 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학급 안에서 석차를 가르고 서열이 정해지며 그에 따른 대우가 달라지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천방지축 악동은 순화된 아동으로 변신하고 또 그 아동은 성장하면서 한 글자라도 더 배우고 익히는 것만이 문명세상에서 적자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어렴풋이 느끼는 학생이 되어가는 것이다.

문자로 밝히는 문명세상의 시크릿 코드인 문자를 배우기 위해 악동이 아동이 되고 아동이 학생이 되는 과정이 여백의 뇌를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 호모사피엔스가 지혜자가 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문자로 지식의 탑을 높게 쌓아 올려 인간과 인간 사이에 관계를 설정하고 관계와 관계 사이에서 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사건과 에피소드를 가져오면서 일종의 원시적 가상세계를 건설한 것이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문자로 만든 세상이다.

문자는 원래 의미를 담고 있는 그릇이다. 그리고 그나마 표의문자는 문자자체에 의미의 흔적이라도 담고 있기에 유추와 짐작으로 지식을 지혜로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있으나 문명이 가속화되면서 우리가 만든 가상세계의 속도는 빨라지고 그 속도를 따라잡으면서 소통하는 새로운 문자가 아마 필요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 탄생된 표음문자는 그야말로 의미보다는 속도감 있는 정보의 전달에 치중하다 보니 문자는 점점 뿌리를 알 수없고 의미는 왜곡되는 암호 같은 문자들로 세상은 채워지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문명으로 세워진 세상의 지식과 원리에서 자연의 지혜와 섭리를 보려면 이제 코드화 암호화 부호화라는 단계를 거쳐 인코딩 된 문자체계를 디코딩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컴퓨토피아의 세계로 진입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천 시 OO로 장소 변경이라고 공지하면 ‘우천 시에 있는 OO 지역으로 장소를 바꾸는 거예요?’ 하고 묻는 분이 많다”라면서, 요즈음 학부모의 문해력에 대해 우려를 표현한 어느 어린이집 교사의 SNS에서 우천(雨天) 시(時)를 ‘우천 시(雨天市)’로 착각하는 학부모들을 보면서 문명으로 건설된 인류가 사는 세상이 광속도로 사이버화되어가는 부작용의 단면을 보면서 일기일회(一期一會)의 심정으로 문자로 밝힌 문명의 횃불이 꺼지기 전에 사이버화의 속도와 방향성만큼은 제고되어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진단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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