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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일용즉도(百姓日用卽道)

by 윤해



2024.07.06

하루를 단위로 세상을 사는 지구 생명체에게 하루의 의미는 하루살이에게는 전 생애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백 년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는 36,500 날의 하루가 반복되며 태양이 36,500번 뜨고 지는 자연계의 장엄함을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값진 경험이 주어지는 것이다.

하루가 주어진다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우리가 사는 하루 안에서 우리가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총합은 열역학의 법칙과 같이 Internal Energy와 Free Energy의 합과 같고 하루를 살기 위해 기본적으로 반드시 해야 할 Internal Energy, 백성일용에 모든 에너지를 사용하다 보면 우리를 사람답게 하는 Free Energy는 고갈되어 하루하루 허겁지겁 생존에 급급하면서 36,500일을 살아도 그날이 그날이 되는 하루살이의 경험 밖에 가질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삶과 마주한다.

우리는 몸을 입고 온 생명체이므로 지구에 와서 살기 위해서는 우선 먹어야 한다, 즉 일용할 양식을 구하여 우리 몸에 공급하여 Internal Energy를 발생시켜야만 생존할 수 있는 일상을 사는 존재 그리고 36,500일을 잘 살아내기 위해 여백의 뇌를 가진 생명체로써 그 여백에 가능성을 불어넣는 Free Energy를 통해 문명을 만드는 존재로서의 우리가 엄연히 상존한다.

성경에는 오늘날 일용할 양식을 주십사 간구하는 주기도문의 내용과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예수가 성령을 따라 광야로 갔다가 그곳에 있는 사탄이 그를 시험하고자 기다리고 있었다. 광야에 이른 '예수'는 40일 동안을 꼬박 단식을 한 끝에 거의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사탄이 '예수' 앞에 나타났다.
"당신이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하고 사탄이 놀리자 '예수'는 단호히 말했다.
"사람이 빵만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동시에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4장 4절)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온 예수님도 일용할 양식, 빵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는 광야에서의 고통 속에서 사탄의 조롱과 유혹을 이겨내고 세상을 구원할 구주 예수로 거듭 나신 것이다.

신의 대리자 예수님도 온갖 유혹과 번민 끝에 건진 백성일용즉도(百姓日用卽道)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내며 사용하고 이용하는 것이 일용할 양식, 빵만이 아니라 세상이 풍요로워지면서 쓰고 사용해야 할 것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빵이 없어 굶는 절대 빈곤에서 탈출할 때 우리에게 제시되었던 도, 빈곤탈출의 길이 한 갈래 길이었다고 하면 이제 그 길을 지나와 풍요로워진 우리 앞에 놓인 길은 고속도로, 국도, 신작로, 오솔길, 하늘길, 바닷길 등등등 많고도 다양하다. 저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빈곤에서 탈출한 우리들이 풍요라고 하는 욕망 속에 풍덩 빠져 저마다 마음을 합치지 못하고 여러 갈래로 마음이 찢어지고 우리 앞에 놓인 천 갈래 만 갈래 길이 저마다의 도인 양 소리 높여 외치고 일용할 양식으로 든든이 배를 채운 각자는 양보는 고사하고 정글과 같은 약육강식의 국회스러운 욕망을 마음껏 시연하며 빈곤에서는 탈출한 사람이 100명이라면 풍요에서 탈출한 사람은 한 명도 어렵다는 풍요의 역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오늘은 오늘의 태양이 뜨고 지며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또 뜨고 질 것이다. 그 속에서 하루를 살아내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여 에너지를 생산하는 지구 생명체 중에 그래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며 지혜로운 자라 일컫는 호모사피엔스의 하루는 생산하는 에너지가 탐욕으로 가득 찬 Internal Energy의 무한한 확장만이 아니라 족함을 알고 양보하고 멈출 줄도 알면서 주위도 돌아보며 한 줌의 나눔도 가능한 Free Energy도 생산하는 자유로운 존재로 거듭날 때 우리는 백성일용즉도(百姓日用卽道)를 제대로 실천하며 멋지게 도와 길을 찾아가는 존재로서 한 생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사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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