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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은 왜 바위에게 달려드는 것일까

by 윤해



2024.07.05

미국 독립 기념일이다. 역사상 계란으로 바위를 친 상징적 장면 중에 하나가 미국의 독립전쟁이다. 그 당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을 상대로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키며 영국의 식민지 조세정책의 부당함에 행동으로 분연히 일어난 식민지 미국인들에게 있어 자신은 계란에 불과했고 대영제국은 거대한 바위로 보였음에는 믿어 의심치 않을 분명한 팩트였을 것이다.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기록이라는 아널드 토인비의 말에서 도전과 응전의 극적인 장면이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도전자의 용기에서 시작된다. 즉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시작되면 이제부터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운의 영역으로 접어든다. 이렇게 도전하는 자와 지키려는 자가 건곤일척의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면 그동안 큰 덩치와 위압적인 외모만 믿고 상대를 기권케 하였던 수많은 요소들은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고 심지어 군대의 작전운용개념(OCD Operational Concept Document)과 같은 정교한 도상 시뮬레이션마저도 한갓 휴지 조각이 되기도 십상인 것이 바로 실전인 것이다.

실전으로 단련된 나나 나라에게 두려운 것은 오직 알을 깨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며 두터운 알에 갇혀 외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면서 내분을 일삼고 화씨지벽의 완벽을 노래하고 있는 내부의 적들이다.

이처럼 계란으로 바위 깨기는 무모한 도전처럼 보이지만 도전자의 전가의 비기 같은 필살기인지도 모르겠다. 바위로 상징되는 거대한 벽 앞에 서 있는 새로운 도전자는 우선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기존의 관념과 상식이라는 껍질부터 깨지 않고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는 한계와 무력감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즉 자신을 돌아보면 할 수 없다는 두려움과 패배감이라는 껍질에 휩싸인 초라한 자신의 모습 그리고 거대한 벽처럼 서있는 바위 같은 상대를 쳐다보면 도저히 돌파할 틈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절체절명의 상태, 이 묘하고도 답답하며 클라우제비츠가 말하는 “전쟁은 마찰과 안개다.”라는 말과 같이 먼저 부딪히고 우연을 기대하는 것이 바로 도전자가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이 아닐까?

계란과 같이 자신을 던져 벽처럼 보이는 바위에 부딪혀 먼저 알 껍질이 산산이 부서지고 부서진 알 껍질 사이로 끈적끈적한 내용물이 드러나 벽과 같은 바위에 달라붙을 때 비로소 난공불락처럼 보이던 벽과 같은 바위에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실금과 같은 틈이 보이고 그 틈과 틈 사이로 드러나는 거대한 균열이 마치 크레바스임을 알아차리면 이제 벽과 같은 거대한 바위는 구멍이 숭숭 뚫리고 급기야 지층과 지층사이의 케즘으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지질학이 시간과 압력의 학문이듯이 도전과 응전이라는 역사의 지층도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상상하기 어려운 용기를 가진 선각자의 헌신이 강력한 압력으로 작동될 때 비로소 벽과 같은 거대한 바위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시간의 단축이 가능한 것이다.

ChatGPT-4o가 몰고 온 광풍에 세상이 떠들썩하다. 저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하고 또 파괴적 기술인지 혁신적 기술인지 어떻게 우리가 활용해야 할지 의견이 분분하다.

사실 나는 그 기술에 대해 자세히 아는 바도 없고 관심도 크게 없다. 다만 인류가 지나온 과거에 비추어 인공 지능을 토대로 하는 기술의 한계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인공지능은 계산능력이 탁월하게 진일보 또는 진백 보한 기계이다. 현대는 더 이상 뛰어난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이다. 차가운 기계문명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뛰어난 기계에 열광한다.

그리고 관계와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는 현대인에게 더 이상 의미를 찾는 관계의 대상이 사람일 필요도 없는 세상과 마주하고 있다. 뛰어난 계산능력을 기반으로 점점 인간을 닮아 휴머노이드화 하고 있는 기계 앞에서 우리는 새로운 동반자가 나타났다고 기뻐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리고 그 기계가 만능박사와 같이 합목적적으로 인간의 불합리와 결함을 보완해 줄 것이라는 희망에 들떠 있다. 물론 그런 분야도 다수 존재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기계문명 세상이니 인공 지능은 이 기계들에게 지능을 제공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생체와 물체의 근본적인 차이를, 물체에게 아무리 큰 압력을 가해도 억겁의 시간을 통해 진화한 생체를 대신하기는 분명코 요원할 것이다.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는 의미의 사이비라는 말이 여기에 적당할까 생각해 본다.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하는 IT 혁신은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계란으로 바위깨는 인류문명의 도전과 응전의 패러다임으로 진행될 것이다. 다만 그 중심에 생체인 우리 인류의 복리를 증대하는 방향성 하나만큼은 지키고 나아갔으면 하는 희망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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