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1
무심 한심 방심 진심, 마음을 표현하는 여러 개의 단어들을 나열해 봐도 마음의 실체를 짐작하기는 어렵다. 마음은 실체가 드러나지 않으므로 이심전심으로 미루어 짐작하면서 무심한 듯 한심한 듯 방심하다가 홀연히 진심이 드러나는 순간 모두가 아연실색하곤 한다.
이처럼 베일에 싸인 마음에 비해 식물의 생식기, 꽃에 꽂힌 사람들의 마음은 무심하고 한심한 단계를 넘어서 저절로 방심하게 되어 본심을 드러내며 진심으로 꽃에 자신을 비추며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상 속에서 공간을 이동하며 시간을 사는 인간은 순간을 잡기 위해 빛을 이용하여 명암 농담을 구별하여 사물을 비추어 보면서 물에서는 때 묻지 않는 깨끗함을 보려고 애쓰며 꽃에서는 시들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다.
인과응보라는 연기법에 따라 만물을 해석하는 자연종교 불교는 2500여 년 전에 이미 우주만법의 진리를 부처님의 염화시중 불립문자를 통해 설파하였고 그 가르침의 증명과도 같은 분야가 최소단위를 찾아가는 21세기 자연과학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마치 부처님과 삼장법사의 손바닥 안에서 좁혀도 보고 넓혀도 보는 손오공의 몸부림과도 같은 것이리라. 여의봉과 근두운이라는 무적의 장비와 능력을 가지고도 긴고주를 외워대는 삼장법사의 주문에 따라 손오공의 머리에 써진 머리테 형상기억합금, 긴고아는 여지없이 손오공의 머리를 조이고 그때마다 삼장법사의 합목적적 도구로만 기능했던 손오공의 좌절에서 제우스에게 불씨를 되잖은 프로메테우스가 처한 가혹한 운명이 연상된다.
어쩌면 이러한 손오공으로 대표되는 구속사적 운명을 예술로 승화시킨 사람들이 화가인지도 모르겠다. 부처님의 손바닥 같은 정해진 화폭이라는 백지위에 여의봉처럼 힘차고 자유롭게 캔버스를 터치하는 화가의 붓 끝에서 근두운과 같이 공중제비를 돌면서 십만 리 장천을 날아가듯이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던 화가의 아틀리에 안으로 때로는 희미하게 때로는 강렬하게 화가의 머리 위에 비추는 한 줄기 빛은 순간을 포착하여 길이 남을 명화를 꿈꾸는 램브란트에게나 모네에게나 손오공의 머리를 조이는 머리테, 긴고아와 다름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긴고아라고 하는 빛을 통제하여 불후의 작품을 만들어낸 화가들의 삶은 삼장법사의 긴고주에서 벗어나는 순간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손오공과 같이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모르는 부도덕한 일생을 보내기 일쑤이다.
화가를 비롯한 대부분 예술가들의 생은 한마디로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삶이다. 인간이라고 하는 구속사적 삶에서 탈피하고 빛을 따라 자유로운 영혼을 추구하지만 여전히 몸이라는 옷을 입고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삼장법사가 때때로 외우는 긴고주에 따라 긴고아가 머리를 조이는 통제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영육 간의 부조화 속에서 램브란트나 고호나 모네 그리고 風雪夜歸人(풍설야귀인)을 그린 조선의 화가 최북(崔北, 1712~1786)은 범인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고뇌 속에서 한 세상을 살다가면서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음을 몸소 증명하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