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8
진실의 올바름도 펙트의 무거움도 두터운 믿음, 맹신 앞에서는 도무지 힘을 쓰기 어려운 세상을 만났다.
그러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겠다.
종교의 신실함과 더불어 믿음을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되는 말이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고 하는 말이다.
믿음은 지금 현재 오지 않은 실상을 미래의 어느 지점에서 당겨와서 쓰는 가불과 같은 형태의 행위는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결국 당겨온 미래는 현재의 실상이 아닌 허상으로 존재하고 그 허상을 메꾸어 주는 에너지가 바로 우리 모두에게 강요하는 믿음이라는 행위가 아닐까?
이처럼 지나온 과거를 낱낱이 후회하고 다가올 미래를 두려움과 불안으로 바라보는 사람에게 지금 현재는 현실에 삼매 하는 삶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의 바라는 실상을 현재로 가져와서 믿고 의지하면서 한 생을 사는 구원과 믿음이라는 가불과도 같은 삶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는 말과 같이 우리 인간은 결핍이 채워지고 고통이 사라지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태연하게 안면을 바꾸며 원래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고 뻐기고 잘난 체하는데 천부적 소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런 이유로 우리 인간은 배은망덕하기가 쉽고 나아가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경우도 다반사이며 백골난망이며 결초보은 해야 할 사람에게 도리어 백번 잘하고 한번 잘못하면 한 번 잘못한 그 한 가지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서 자신의 표리부동을 감추고 위장하기에 급급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가 될 수 있다는 자각과 반성이 없으면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기 정당화를 멋들어지게 하고 모든 잘못을 남 탓으로 돌리는 행동을 다반사로 하고 사는 존재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악한 세상인지 선한 세상인지 알 수 있는 바로미터가 세상을 구성하는 최소단위가 살아있느냐 죽어가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가정, 사회, 국가, 세상이라는 세상을 구성하는 조직의 최소단위인 가정이 위태롭다.
먹물과 풍요로 도배를 하고 끝없는 욕망으로 무장된 차도남 차도녀들이 만나 가정을 꾸리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희생하고 그 사랑과 희생으로 애기를 낳아 가정을 구성하고 살아가는 일이 더 이상 평범한 이야기가 아닌 것은 합계출산율 0.6명대의 통계가 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소리 소문 없이 세상의 최소단위인 가정을 이루기도 어려워지며 어렵사리 이룬 가정을 지키기도 어려운 악세에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바라는 것의 실상인 믿음을 기반으로 달려온 대한민국 사회에서 보다 번영된 사회를 이루겠다는 일념 하나로 한 생을 희생한 영웅들의 삶에 대한 부정적인 믿음이 맹신이 되어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고 있다.
그 자리를 이기심으로 똘똘 뭉치고 공동체의 최소단위 가정을 이루게 하지 못하게 하고 이룬 가정도 파괴하려고 혈안이 된 이적세력들이 판을 치고 있다.
가불 된 진실, 믿음이 맹신이 되고 맹신이 광신으로 변해가는 사회현실 속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중에 최고는 사랑이라는 가스펠송의 가사를 외우고 다녀야 악한 세상을 너머 선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지, 월급을 가불 한 샐러리맨의 심정 마냥 마음이 편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