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04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은 대화인 것 같다.
대화는 기본적으로 소통을 하기 위해 너와 나의 경계를 잠시 잠깐 허물고 사람의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대화도 나눈다고 하고 마음도 나눈다고 하는 것이다.
나눈다는 의미는 중의적이다. 서로가 정을 주고받는다와 같이 소통하고 교류한다는 의미도 있고 , 선의로 시작된 대화가 뭐 때문인지는 모르나 파국으로 치달아 종국에는 두 사람 사이를 완전히 나누는 경우가 허다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가 아찔하게 겪는 부부간의 대화가 순식간에 부부싸움으로 비화되는 것처럼 말이다.
곰 같은 남편은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고 , 여우 같은 안 해는 부부가 살아온 전생애를 복기하며 어떻게 남편의 아픈 대목을 그리도 잘 기억하는지.....
그렇게 한바탕 전쟁이 지나가면 선의로 시작된 대화가 기억하기도 싫은 악몽으로 바뀌는 것이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인가? 잘하려고 시작된 대화가 꼬이는 이유는 우리가 대화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함부로 하는 이유는 아닐까? 생각을 해보자
먼저 대화는 화자의 수사학이 아니라 청자의 심리학이다
내용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 내용이 아니라 태도와 말투다. 대화의 90%는 말투다. 무심코 툭 내뱉는 말, 듣는 사람은 하나의 덩어리, 정서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감정을 건드리면 수습이 안 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대화를 하기 직전의 몸의 컨디션이 대화의 질을 결정하는 교감신경 항진의 부작용이 대화의 향방을 결정하는 불가지의 영역이며 인간진화의 끝판왕 아닐까?
불과 한세대 전만 해도 우리는 이 불가지 영역이라는 대화의 장에서 여백을 가지고 살았다. 말과 글이 말씀과 글 씀이 되기까지 시간과 도구의 제약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여백 간에 생각을 가다듬고 감정을 추스르며 말과 글이 날뛰지 못하게 시건장치施鍵裝置를 가지고 대화에 나섰다.
말과 글이 발화되고 대화로 나아가는 도구의 족쇄가 풀린 현대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인간진화의 정수로서의 대화가 어려워졌다. 마음과 마음이 소통하고 염화시중, 불립문자의 경지까지 나아가려면 얼마나 많은 장애물을 넘어야 할지 아득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