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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해 Dec 19. 2024

[ 윤 해 록] 간서치(看書痴), 간국치(看國痴)


책만 보는 바보, 간서치(看書痴) 이덕무의 서재를 구서재(九書齋)라 부르며 책에 대한 9가지 일과 뜻을 통해 책에 관하여 모든 것을 체득하겠다는 실학자로서 그의 의지를 엿보게 한다.


실학자 이덕무는 구서재(九書齋)를 통해  책을 입으로 소리 내서 가락을 맞춰 읽는 독서(讀書), 책을 눈으로 읽는 간서(看書), 책을 소중히 보관하고 간직하는 장서(藏書), 책의 중요한 부분을 손으로 필사하면서 읽는 초서(鈔書), 책의 오·탈자 등을 살피고 교정해 가며 읽는 교서(校書), 책을 읽은 후 자신만의 감상과 평가를 하는 평서(評書), 남의 책을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만의 책을 쓰는 저서(著書), 다른 이의 책을 빌리는 차서(借書), 책을 햇볕에 쬐고, 바람을 쐬어 말리는  폭서(曝書)라는 구서(九書)를 자신의 서재(書齋)에서 구현하여 그만의 독서를 통한 세계를 완성하며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 책만 읽는 바보 행세를 하고 다니며 시대를 잘못 만나고 시대를 앞서 나간 조선 후기의 실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천지지간 만물지중에 유인이 최귀 하다는 동몽선습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인간이 만든 세상에서 순간을 잘라 생각해 보면 인간보다 귀한 존재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 세상의 수많은 논쟁과 시빗거리가 쏟아진다. 매 순간순간마다 오로지 인간이 최고라고 하는 실행할 수 없는 명제를 앞에 두고 얼마나 많은 지식인이 좌절하고 미쳐가고 결국에는 바보가 되어간 역사 속 사례는 열거하기도 벅차다. 광인과 현인의 차이가 오로지 박자 차이라는 말은 역사적 인물의 부침과도 그대로 적용되는 만고의 진리이다.


우리는 천지인을 이야기할 때 단순히 보이는 대상으로서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을 말하지만 기실 천지인은 한순간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광대무변한 우주 안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명멸하며 변화하는 파노라마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이 흐름과 변화에 역행하며 시대가 휘두르는 박자를 무시하고 엇벅자를 내면서 좌충우돌하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원형이 어쩌면 조선 후기 이덕무를 비롯한 실학사상으로 뭉친 실학파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늘 문명이 그러했듯이 이상과 현실은 괴리되었으며 일상과 상상은 박자가 어긋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 때의 순풍과 리듬을 행운으로 여기고 순간적 박자의 일치를 기적이라 여기며 세상을 호락호락 간과한 대가는 혹독했으며 부작용은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이들을 내몰았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유전자 돌연변이가  개별생명에게 있어 풍요로운 유전자 풀을 가져와 생존과 번식에 지대한 기여를 하듯이 조선후기 간서치 이덕무를 비롯한 실학파 간서치(看書痴)들의 노력이 한 톨의 밀알이 되어 망국으로 풍찬노숙하던 선각자들의 귀감이 되어 책만 읽는 바보에서 행동하는 바보로 바뀌고 그 바보들의 행진이 하늘에 닿아 건국에 이은 대한민국의 번영을 가져왔다면 간서치(看書痴)를 넘어선 간국치(看國痴)까지 비약한 것이 되는 것인지 스스로 의심해 본다.


간서치(看書痴)가  간국치(看國痴)로 비약하였어도 바보는 바보인 것이다. 일상은 영악한 가성비의 귀재들이 대한민국을 점거하여 눈알이 머리뒤까지 돌아가며 저마다 계산기를 돌리겠지만 늘 역사는 무심하게 일상의 적분으로 돌아가지 않고 간서치(看書痴)와 간국치(看國痴)가 바보처럼 묵묵히 걸어가는 미분의 한 걸음으로 세상과 역사의 박자가 일치하는 천지인 삼박자 짹팟이 터질 때 역사의 수레바퀴는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해 움직인다는 불변의 진리 앞에 한 사람의 간서치(看書痴)이자 간국치(看國痴), 즉 바보로서 그저 겸손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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