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윤 해 록] 백년전쟁 80, 춘래불사춘 1980

by 윤해


동트기가 어려운 만큼 봄도 더디게 온다. 칠흑같이 깜깜한 밤도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서슬 퍼런 유신시대 40대 기수론을 앞세우고 정치의 전면에 나타난 야당대표도 정권의 이인자로서 대통령 빼고는 다해본 여당의 실세도 납치와 감금 그리고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온 레버넌트가 된 재야의 실력자도 모두가 학수고대하고 조바심으로 기다리던 1980년의 봄은 동틀 무렵 만치 더디고 천천히 그들과 국민들에게 다가왔다.

최고 권력의 공백, 더구나 18년 집권한 독재자의 죽음은 대한민국 모든 분야에 즉각적인 진공 상태를 가져왔고 그러한 진공에 새로운 공기를 누가 먼저 집어넣는가라고 하는 권력을 향한 선착순 게임이 시작되었다. 독재자의 그림자 뒤에서 숨어있던 보이지 않던 권력집단이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오기까지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자는 거사 직후의 멘털붕괴로 인해 중정이 아닌 육본으로 가는 패착을 두면서 체포되었고 같은 자리에 있던 계엄사령관은 독재자의 보이지 않던 히든카드에 의해 날아갔고 권력을 향한 선착순 게임의 최종승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정규육사 1기( 육사 11기)의 몫으로 떨어졌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으로 공공연하게 권력의 중심부로 떠오른 하나회는 하나같이 일사불란하게 자신들의 직속상관을 배반하고 명령을 불복종하면서 하나회라고 하는 군내 사조직을 총동원하여 계엄사령부를 무력화하고 권력의 진공을 메우면서 대한민국을 하나하나씩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980년 대한민국의 봄은 누군가는 민주화의 봄으로 누군가는 권력찬탈의 봄으로 또 누군가는 대한민국 번영으로 가는 길목의 봄으로 학수고대와 조바심으로 기다리고 맞이했을 것이다. 마치 눌려진 용수철이 더욱더 높이 튀어 오르듯이 마치 압축된 진공이 더 강력하게 폭발하듯이 춘하추동 계절로서의 봄은 성큼 다가왔지만 각자 마음먹은 대로 모두의 희망대로 봄은 오지 못했고 따라서 1980년 봄은 하나같이 이구동성으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을 외치며 누군가는 거리로 누군가는 광장으로 또 누군가는 대학 캠퍼스로 달려가며 저마다의 우려와 기우 그리고 최종적인 희망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해 겨울 대한민국의 미래는 12.12 군사반란을 통해 결정되었고 망국의 식민지 청년출신들이 저마다 자강 하던 방법으로 선택한 일본육사 만주군관학교 그리고 광복군을 양성했던 신흥무관학교 하다 못해 마적, 비적 출신까지 독립전쟁의 피아구분도 모호한 체 해방과 건국 그리고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급조되고 소모되어 갔던 창군의 주역들과 달리 거악의 일제가 물러나고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입교하여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의 패권질서가 공고히 되어가던 1955년 임관한 육사 11기들은 바로 전 기수 육사 10기들이 한국전쟁에서 절반이나 전사하여 소모된 것과는 달리 모두가 온전히 살아남았고 그들은 최초로 미국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의 커리큘럼에 따라 배우면서 배출된 새로운 군대, 즉 신군부였다.

1908년 1월생은 격동하는 그해 겨울을 뒤로하고 희망의 80년대 첫 봄, 신입생 입학식을 보기 위해 오랜만에 대학교 교정을 찾았다. 갈 사람은 갔지만 여전히 올 사람은 오고 있는 봄을 맞은 화사한 대학 캠퍼스는 저마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새로운 청년들의 희망찬 모습으로 가득 찼고 그들의 눈빛 하나하나는 반세기 전 망국의 식민지 청년으로서 일본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잔뜩 주눅 들어 대학에 입학했던 자신들의 자취는 그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 당당함이 묻어 있었다.

봄 여어르음 갈 겨어우을, 사시사철 춘하추동이 분명한 우리나라에서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이처럼 기간이 확연히 다르다. 그해 1980년 봄은 유난히 짧았고 겨울은 유난히 길었으며 여기에 더해 봄 다음에 차디차고 엄혹했던 유신시절 보다 더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다.

새로운 질서는 새로운 피를 부르고 마땅히 피를 흘렸어야 할 자리에 있던 자들이 보신하고 타협하면 엉뚱한 민초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감당하기 힘든 피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 역사의 섭리요 반복되는 역사의 평행이론이다. 1980년 5월의 봄과 5월의 대한민국은 반란을 막아야 할 자들이 막지 못하고 죽어야 할 위치에 있는 자들이 죽지 않고 망국을 한 혼군 고종과 을사오적 때문에 이천만 동포가 순식간에 일제의 이등신민이 된 것처럼 우남이 심어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삽시간에 탱크를 앞세운 신군부에 의해 진압당하고 학생들과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철 이른 재야 지도자들의 그릇된 사욕과 권력찬탈을 통해 대한민국을 접수한 신군부 그리고 지금도 베일에 싸인 무장동조세력에 의해 그해 대한민국의 봄은 실종되었으며 기다리고 기다렸던 봄은 춘래불사춘의 봄도 아니고 그냥 차디찬 겨울로 곧장 달리고 있었다.

오월의 비극과 팔월의 새로운 권력으로의 이동 간의 인과관계가 가장 큰 이득을 본 자가 범인이라는 수사의 ABC는 되겠지만 국가라고 하는 복잡계를 설명하기에는 지금도 여전히 부족하다. 혹자는 확신에 차서 쾌도난마로 사건의 전말을 재구성하고 혹자는 갖가지 음모론으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고 혹자는 정말로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총탄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 뿐인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다. 분명한 것은 사건의 본말은 하나를 가리키지만 사건의 해석은 백가지로 갈려나가는 한반도 백년전쟁의 재판이 그해 5월에서도 여전히 벌어졌고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죽은 자에게 빚을 갚기는커녕 죽은 자들을 저당 잡아 빚을 내어 흥청망청 쓰고 있는 기막힌 백년전쟁의 역사적 평행이론은 지금까지도 처절하게 반복되고 있다.

세월은 그들이 행한 선행도 그들이 저지른 악행도 묻어주는 것처럼 보일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망회회天網恢恢하고 소이불실疏而不失이라, 하늘의 그물이 성근 것 같아 보여도 놓치는 법이 없으니 역사의 정반합도 세상의 원리도 반드시 사필귀정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섭리 앞에 그저 숨 죽이고 겸손해야만 할 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윤 해 록] 백년전쟁 79, 동틀무렵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