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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해 록] 백년전쟁 79, 동틀무렵1979

by 윤해

태양계를 사는 지구나 세상을 사는 인간이나 동틀 무렵이 가장 춥고 길다. 해는 뜨지 않고 일진광풍이라는 태양풍을 동반한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어오면서 찬란한 태양을 기다리는 마음은 초조를 넘어 조바심이 되고 일각이 여삼추라 찰나가 영원처럼 느껴진다.

1979년은 한반도 오천 년 가난을 몰아내고 선진국행 막차를 탔던 산업화 세력들이 60년대부터 시작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차근차근 실현되면서 오일쇼크라는 충격을 딛고 70년대 중화학 공업의 기반을 닦고 국민들의 마음에 하면 된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새마을 운동을 통해 싸우면서 건설한다는 모토아래 온 국민을 새 마음으로 단합시켜 희망의 80년대를 꿈꾸게 한 한 해였다.

그러나 산업화의 이면에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개발독재와 민주화라고 하는 양립하기 어려운 시대 상황은 서구 선진 민주주의로 곧바로 이행할 수도, 이행해서도 안 되는 죄수의 딜레마에 갇혔고 그 딜레마에서 탈출하고 조국 근대화라고 하는 핵심목표에 도달하고자 한국적 민주주의를 표방한 10월 유신을 단행한 박정희는 우남이 심어둔 서구적 민주주의와 각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산업화로 인해 자본과 소득증대의 달콤한 맛을 본 국민들의 자유와 민주를 향한 욕구는 더 이상 개발독재를 앞세운 한국적 민주주의에서 한국적을 어서 빨리 떼어내고 주권자로서 국민의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성급함이 곳곳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개발독재로 18년을 달려온 고독한 독재자 박정희의 곁에는 청와대 야당, 육여사의 빈자리가 짙은 그림자로 남았고 권력자의 주변에는 빈자리가 생기자마자 절대 충성과 아부로 단련된 자들이 하나둘씩 빈자리를 메워가면서 그럭저럭 권력은 파멸을 향해 한 발짝씩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1908년 1월 생의 눈에 비친 고독한 독재자 박정희는 환갑을 지나 진갑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그가 망국의 식민지에서 태어났고 건국의 해방공간에서 죽음에서 살아 나오고 살육의 전쟁터에서 힘을 키우고 혁명을 통한 산업화를 기어이 수행하면서 날개가 부러지고 몸이 녹아 나갔지만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그의 단심은 오해와 억측으로 지나치고 국민들로부터 무시당하는 모습에 1908년 1월생은 희망의 80년대를 눈앞에 두고 동틀무렵의 색다른 어두움과 조바심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역사의 가정은 늘 판단의 변화로부터 시작하듯이 한 사람의 인생이든 한 국가의 명운이든 수많은 도전을 받은 그가 어떠한 응전을 하는가가 역사를 만들어 간다. 1979년 1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은 생전 마지막이자 집권 마지막 신년사에서 의지와 땀으로 보람찬 미래를 창조하자고 그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강조했으나 그가 달려온 18년 세월의 풍상은 그를 몹시도 초췌하게 만들었고 날개 잃은 그가 양 날개라고 여긴 인물들의 면면은 초라하고 궁색했다. 이처럼 권력자가 행사한 인사의 난맥상은 무모한 판단이나 판단의 부재를 가져와 파국으로 달려간다. 한국에선 이 해 상반기부터 2차 오일파동, 율산사태, YH 사건, 부마항쟁 등으로 매우 뜨거운 정국을 맞이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야당 당수 신민당 총재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하는 악수를 두게 된다. 이러한 권력의 남용 뒤에는 권력 안에서의 자정작용이 사라지고 힘의 논리를 기반으로 하는 간섭과 남용이 권력의 중심에서 횡횡하고 결국 그 불씨는 김재규 중정부장에 의해 실행된 10.26 대통령시해사건이었다. 가장 믿었던 동향의 후배에게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안가에서 경호실과 중정요원의 이중 경호 중에 발생한 이 희박한 확률의 거사로 인해 죽음에서 돌아온 자, 레버넌트 박정희는 결국 그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대한민국 80년대 번영을 목전에 두고 영면하게 되었다.

1908년 1월생은 1.4 후퇴로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교장이었던 시절 학교운영을 의논했던 김재규 부친과의 에피소드가 갑자기 떠올랐고 자식의 과격함을 염려했던 아버지의 기우가 현실이 되어 역사를 바꾼 10.26이라는 비극 앞에서 할 말을 잊었다. 어쩌면 찢어지게 가난했던 식민지 청년출신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을 맞고도 너무도 담담하게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의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이미 1948년 여순 반란사건에서 한 번 죽은 목숨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막연히 짐작해 본다.

박정희는 대통령이기전에 한 사람의 혁명가였고 혁명가이기 전에 한 사람의 군인이었으며 군인이기 전에 한 사람의 교사였으며 교사이기 전에 한 사람의 학생이었으며 학생이기 전에 찢어지게 가난했던 농민의 아들이었다. 그의 파란 만장한 개인사는 그대로 한반도 백년전쟁의 전쟁사이자 투쟁사이기도 하다.

그 시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식민지 청년 출신의 산업화 세대는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역사의 무대로 급격하게 사라져 갔지만 그들이 이루어낸 산업화의 성취는 두고두고 대한민국의 위치를 반석 위에 세운 것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빛과 그림자처럼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그 누구도 공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끝까지 자신과 동료를 몰아붙이면서 빈농의 아들이라는 결핍을 이겨내고 부드러운 교사의 손길과 강인한 군인의 용기를 동시에 가지고 혁명가의 결기와 지도자로서의 소명의식으로 똘똘 무장하여 아직 오지도 않은 세대의 안위와 번영을 위해 그렇게 눈물과 피땀을 흘린 한 사람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누군가는 자신의 사익을 위해서 또 누군가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적세력의 사주와 선동으로 그를 악마화한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의 지금을 있게 한 그의 진면목을 바라볼 용기에 미치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망국의 식민지 청년으로 태어난 한계를 극복하고 몸을 일으켜 자신을 세워 다시는 자신과 같은 망국의 식민지 청년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결핍을 승화시키며 국가라고 하는 공동체를 반석 위에 올리기 위해 할 수 있는 곳 끝까지 자신을 밀어붙인 진정한 초인인 동시에 고독한 독재자였다는 사실이다.


그의 진면목을 알아내기까지 우리 공동체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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