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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해 록 ] 필멸적 존재로서의 행복

by 윤해

생로병사라고 하는 유기체로서의 인간, 흥망성쇠라고 하는 무기체의 원리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세상 속의 인간, 희로애락이라고 하는 희비쌍곡선의 리듬이 춤추면서 기억이 감정이 되고 감정이 느낌이 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필멸적 존재라는 자각을 통하여 행복에 다가선다.

지구 생명의 탄생은 불로불사의 해당계 생명체가 미토콘드리아와 결합하면서 생로병사의 여정을 겪고 불멸의 존재에서 대를 이어 살아가는 필멸의 존재로 탈 바꿈 되었다. 이처럼 고등 생명체로의 변신은 자기의 한쪽 어깨를 잘라 내어 주는 희생과 고통 없이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영역이다.

해당계 세포가 미토콘드리아와 결합하면서 혐기성 세포에서 호기성 세포가 되면서 생명의 질은 폭발적으로 성장했으나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우리는 불멸을 포기했고 필멸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대를 이어 살아간다는 관점에서는 불멸적 존재이나, 개별 개체의 입장에서는 각각 한정된 시간이 지나면 생명의 시계는 멈추고 필멸해야 한다는 감각 때문에 한 생은 생로병사와 흥망성쇠 그리고 희로애락이라는 리듬이 교차되고 그와 더불어 행복이라는 파랑새를 쫓기 위해서 한 생의 하늘에 빨주노초 파남보 라고 하는 무지개 만을 바라보며 희비쌍곡선이라는 기억과 감정 그리고 느낌을 느끼며 우리들의 한 생은 행복감과 불행감을 동시에 맛보면서 꾸역꾸역 한 세상을 살아낸다.

38억 년 생명의 역사에 비하면 티끌보다도 가벼운 인간의 역사를 이해할 때 우리는 생명의 경외감과 동시에 인간이 만들어낸 필멸적 존재로서의 행복감에 겨우 한 발자국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기원전 399년 71세의 나이로 악법도 법이라고 탈옥 권유를 물리치고 고지식하게 죽어간 철학자이자 석공이며 군인이었던 소크라테스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 아테네 법정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사랑을 말하던 순간과 같은 최후 변론을 마치고 독배를 마시고 죽어갔다.

"아테네 사람들이여, 죽음을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비겁함을 피하는 겁니다. 비겁함은 죽음보다 빨리 달려오기 때문입니다.
가장 고상하고 쉬운 길은 여러분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가장 선량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직접 관심을 갖고 스스로 그렇게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기 위 해 떠나고, 여러분은 살기 위해 떠날 것입니다."

그로부터 무려 2400년이 흐른 후 여기 두 사내, 아돌프 피셔(Adolph Fischer)와 조지이스트먼(George Eastman)의 아래와 같은 일화를 글벗이 보내왔다.

​아돌프는 19세기말 잔혹한 자본주의가 미국에 정착할 무렵 태어났다. 악독한 자본가는 자본을 무기로 노동자를 착취 억압했고, 노동자는 참다 참다 그만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악독 자본가는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들에게 선택된 사람이 아돌프였다. 검은돈이 오갔고, 증거는 조작되었으며, 그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바로 그 순간 사형이 집행되던 그 찰나, “바로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라는 최후의 말을 남기고 교수형 대신 가장 인간다운 방식이 적용된 전기의자에서 죽어갔다고 한다. 조지 이스트먼은 필름 카메라 ‘코닥’의 창업자다. 위대한 경영자, 그의 사례는 하버드 MBA 수업에 단골로 등장할 만큼 놀라움의 연속이다. 1930년대에 이미 노동시간 단축, 장애인 편익, 은퇴 후 연금, 생명보험, 주식 1/3 종업원 배당 등등 지금 봐도 지나칠 정도의 혁신기업이었다. 그런 그가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내 할 일은 다 끝난 듯하오. 이제 무엇을 더 기다리겠소(To my friends: My work is done. Why wait?)”라며 만년필 뚜껑을 닫은 뒤 시가를 한 대 피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 사람은 모함으로 억울한 사형선고를 받고 죽어가면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라고 했으며, 또 한 사람은 남들에게 가장 존경받은 인생의 최절정기에서 “나는 더 이상 살아야 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면서 자살한다.

소크라테스, 예수, 아돌프 피셔와 조지이스트먼이라는 네 사내의 죽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혹시 필멸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고 자발적으로 죽어 가면서 죽음의 공포를 자연스럽게 이겨내고 난 자들 만이 죽음을 앞두고 느낄 수 있는 완전한 행복감을 그들이 느낀 것은 아니었을까? 막연히 짐작해 본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한 생을 살면서 우리는 필멸적 존재로서의 행복감보다는 불멸적 존재로서의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 분투노력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허무는 바로 필멸과 불멸을 헷갈려하면서 필멸을 애써 부정하고 불멸의 방향으로 자기도 모르게 달려가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 소리를 많이 듣는다. "무슨 천년만년 산다고 그리 바쁘냐?" 이 짧은 말속에서 필멸적 존재로서의 행복이 과연 무엇인가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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