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방학이 끝나갈 무렵 나는 항상 바빴다. 그동안 신나게 노느라 미루어 둔 방학숙제를 개학일이라고 하는 마감시간에 임박하여 제출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하루 종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참 많이 분주했다. 방학이라고 하는 주어진 시간은 많았지만 나는 그야말로 배움에서 해방되었다는 방학 본래의 뜻에 충실히 따르면서 배움보다는 놀기를 좋아해서 방학기간 대부분의 시간을 방학 숙제를 묵혀 놓은 체 이리저리 놀러 다니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나이 또래에 비해 웃자란 두뇌와 달필에 속필까지 갖추고 토끼처럼 뛰어다니던 나로서는 꾸준하고 성실하게 방학 숙제를 준비하는 친구들을 느려터진 거북이처럼 백안시했지만 정작 개학을 앞두면서 제 빠른 발만 믿고 잠자다가 깨어나 화들짝 놀라며 뛰어가는 토끼의 처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른 숙제는 어찌어찌해 볼 수 있었는데 곤충채집과 식물채집과 같이 살아있는 곤충과 식물을 채집해 오라는 숙제 앞에서 개학이라는 마감시간에 쫓기던 나를 좌절케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식물을 채집하여 다디미 돌판으로 눌러 식물채집 과제를 마쳤고, 나비와 잠자리 매미를 잠자리 채로 잡고서는 어리고 여린 마음에 차마 살아 있는 곤충에 바늘을 꽂지 못해 잠자리채 그물 그대로 가져가 큰 누나에게 부탁해서 곤충채집까지 완수하면서 방학 숙제를 겨우 마칠 수가 있었다.
지금은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 있던 방학숙제의 추억을 소환해 보면 그때는 몰랐다. 자연이 주는 풍요를 그리고 지천으로 깔려 있던 온갖 꽃과 식물들의 다채로움을, 더불어 사방팔방에서 날아다니던 나비잠자리 매미와 같은 곤충들의 향연을 그냥 당연히 주어진 풍경처럼 아무 생각 없이 소비하고 학습기를 통과하기 위한 식물채집, 곤충채집의 도구로 쓰고 버렸다.
번데기가 애벌레가 되어 우화羽化 하고 등선登仙 하듯이 한여름밤의 짧은 혼인비행을 위해 무려 6년간이나 기다리고 기다리며 잡은 번식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렇게 쉬지 않고 매미는 울고 또 울었다는 금선탈각金蟬脫殼이라는 생명의 장엄한 스토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까마득히 몰랐다.
힌두교에서는 남자의 일생을 학습기, 가주기, 임서기, 방랑기로 나누어 그 각각의 기간 동안에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를 마누경전에 자세히 기록하였고, 동아시아 문명권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공자는 한 생을 사는 것이 유교儒敎에서 이르는 다섯 가지의 복福인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을 이르는데, 유호덕(攸好德)과 고종명(考終命) 대신 귀(貴)함과 자손(子孫)이 번성함을 꼽기도 하였다.
이처럼 부귀 빈천과 수복강녕이 교차하는 현실세계에서 유교가 도덕을 지키는 것을 낙으로 삼는 유호덕과 편안하게 숨을 거두는 고종명을 특별히 오복의 마지막으로 넣은 이유도 유종지미를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여기는 유자儒者에게 있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누구는 노년까지 치아를 잘 보존한 것을 오복의 하나로 칠 정도로 오복에 대한 혼선이 크지만 오복 중의 오복은 유한한 생명을 사는 인간이 마지막까지 편안하게 명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 번식을 향한 욕망으로 금선탈각金蟬脫殼 한 여름 한 철 매미의 울음소리도 점점 사라져 가는 침묵의 봄을 지나 여름까지도 조용해질 무렵 만물의 영장으로 자부하는 우리 인류가 마주하고 있는 현대의료는 도무지 천수를 다하고 제명대로 가겠다는 고종명考終命이라는 오복을 왜곡하고 방해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우리는 과연 짐작이나 하고 살아가는지 우려와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