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 해 록 ] 아사리판阿闍梨判, 아수라장阿修羅場

by 윤해

아사리판阿闍梨判 인지 아수라장阿修羅場 인지도 모를 새로운 국내외 질서가 요동치는 급변하는 세상 속으로 우리 모두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고 있다는 불안한 조짐이 새해벽두를 감싸고 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쟁패하는 냉전질서의 시작을 연 한국전쟁의 당사자 대한민국이 전쟁의 상흔을 딛고 미국을 비롯한 유엔 16개국의 지원으로 기사회생하고 전후 이승만 박정희를 비롯한 수많은 히든히어로들의 분투노력에 힘입어 1988년 88 올림픽을 통하여 동서 냉전 체제전쟁에서 승리하였음을 세계만방에 보여 줌으로써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1990년 2월 7일 소련 공산당 중앙회의는 자본주의한테 사실상 패했음을 인정했다.

냉전의 시작과 종식까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패권질서를 돌리는 수레바퀴의 린치핀으로서 결정적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고, 그 결과 팍스아메리카나 시대를 통해 그토록 염원했던 선진국에 도달하였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폐허에서 번영의 서사를 쓴 강대국의 흥망 사는 있었어도 식민지에서 독립한 약소국 중에서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독특한 점은 분단국가로서 80여 년 동안의 안보와 체제경쟁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는 점이다.

이렇게 다지고 다진 대한민국의 위상이 세계사적으로 독보적이고 희귀한 사례라고 하는 팩트를 무시하고 한쪽에서는 탐욕을 또 다른 쪽에서는 완벽을 부르짖으면서 80년간 히든 히어로들이 멸사봉공하며 일으킨 나라를 아사리판阿闍梨判으로 휘젓고 아수라장阿修羅場으로 뒤엎는 방종과 만행의 씻김 굿판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도 지우기가 힘들다.

관성과 직전기억의 함정은 세상이 끊임없이 우상향 한다고 믿는 맹신을 가져온다. 세상도 자연의 일부이므로 직선적 원리보다는 곡선적 섭리를 따를 수밖에 없다. 끊임없는 곡선적 파동 만이 우리 자신, 나아가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근원적 섭리를 도외시 한 체 개인의 욕망과 결핍의 해소를 위해 화씨지벽이라는 완벽을 차용하여 공동체의 어젠다로 삼아 현재를 결박하고 미래를 말살시키려는 몰지각한 세력의 발호 때문에 온 세상이 아사리판이 되어가고 아수라장으로 달려가고 있다.

아사리판은 질서가 없이 어지러운 곳이나 그러한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빼앗을 사람이 많으니 빼앗을 사람과 빼앗길 사람이 한 데 어울려 무법천지가 된 상태를 비유한 말이라고 한다. 아수라는 얼굴 셋·팔 여섯의 수호신으로 여러 얼굴과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원래 싸움의 신이다. 아수라장은 아수라에서 나온 말로, 엉망진창·뒤죽박죽의 상태를 뜻한다.

75년 전 겨울 1951년 1월 14일 한국전쟁의 전황은 암울한 패배감이 전선을 지배하고 있었다. 패배도 버텨 내기만 하면 맷집이라도 늘어나지만 불과 석 달 전 패주하는 북한군을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간 유엔군과 국군이 압록강 초산과 두만강 혜산진까지 한반도통일을 눈앞에 두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통한의 흥남 철수와 1·4 후퇴까지 속절없이 밀리면서 한때는 37도선 이남의 평택-제천-삼척 라인까지 후퇴하기도 하였다.

전쟁에서는 승리의 영광보다 패배의 교훈에서 더 많이 배운다. 더욱이 짧은 횡축과 비교적 긴 종축의 한반도 지형을 오르락내리락, 즉 승강하면서 일진일퇴의 공방을 주고받던 한국전쟁에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교훈은 파죽지세의 승리 보다도 암울한 패배 속에서 지휘관들은 어떤 판단을 했으며 병사들은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하여 초개와 같은 목숨을 버려가면서 대부분의 전장에서 어떻게 그러한 질서 있는 퇴진을 할 수 있었는가?라고 하는 의문이었다.

승패가 교대되는 전투의 기록이 전사가 되어 전쟁의 수레바퀴를 돌려 비록 전선은 도로 38선 부근의 휴전선이라고 부르는 남북간 군사분계선에서 멈추었지만 동서 간의 냉전질서는 전후 40여 년이 되기도 전에 공산주의의 패망과 자본주의의 승리로 끝났다.

이 같은 패권질서의 승리가 한국전쟁에서 패전의 시기에서도 질서 있는 퇴진 후에 반격을 보여준 릿지웨이, 밴플리트 장군을 위시한 수많은 히든히어로 장병들의 분투노력이 밑거름이 되어 전후 냉전 승리의 소중한 단초로 작용한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비록 국내외 상황이 아사리판, 아수라장으로 흘러가고 있어도 시대의 주인인 우리가 질서 있는 퇴진을 통하여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밑거름이 되고자 한다면 최소한 손자병법의 모공(謀攻) 편에 나오는 군대가 진격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면서 돌진을 명령하는 (不知軍之不可以進而謂之進), 암군暗君의 실책은 두지 않는 주권자 국민이 될 수 있으리라 확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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