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 반복 불가능성이 예술의 본질
우리는 AI가 이미지를 몇 초 만에 만들어내고, 음악과 글까지 자동으로 조합해 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속도는 미덕이 되었고, 효율은 종교처럼 숭배된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쉽게’라는 말이 기본값이 된 시대에 예술은 과연 어디로 가야 하나.
그 방향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바로 행위 예술가의 대모이자, 자신의 신체를 극한의 도구로 삼아 인간 정신의 경계를 탐구해 온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의 <The Artist is Present>(예술가는 존재한다)다.
아브라모비치는 미국 뉴욕 현대 미술과 MoMA에서 3개월 동안, 박물관 운영 시간 내내, 움직이지 않고, 말하지 않고,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는 행위만 수행했다. 이 행위는 예술가에게 어떤 기술도 대체할 수 없는 신체적·정신적 부담을 전제로 한다. AI가 제거하려는 바로 그 요소—느림, 반복 불가능성, 예측 불가능성, 인간의 몸—이 작품의 본질이다. “한 사람과 한 사람 사이의 단 한 번의 만남”의 경험은 AI가 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헬싱키사노맛(HS)의 칼럼니스트 아스타 레파(Asta Leppä)는 예술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예술은 누군가에게 실제로 무언가를 요구했을 때만 탄생한다.”
이 정의를 좀 더 풀어 말하면, 예술이란 결국 누군가의 시간·몸·감정·책임을 요구하는 행위이며, 그 요구를 감수한 흔적이 작품 속에 남을 때 비로소 예술이 된다는 뜻이다. AI는 그 흔적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예술의 본질을 대체할 수 없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The Artist is Present>는 그녀의 이런 예술에 대한 정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다. 예술가는 관객 앞에 실제로 존재했고, 누군가 울면 그 울음을 받아야 했고, 누군가 떨면 그 떨림을 함께 견뎌냈다. 인터넷에서 큰 화제가 되었던 오래전 헤어졌던 연인과 재회하는 장면도, 그녀가 말없이 감당해야 했던 감정적 책임의 순간이었다. AI는 감정을 모사할 수는 있어도, 감정을 감당할 수는 없다. 예술은 결국 누군가가 누군가 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예술은 두 가지 방식으로 AI시대에 저항해야 한다. 첫째는 느림과 수고다. 둘째는 실제적·신체적 현존이다. 예술가는 관객과 직접 마주하고, 감정적 반응을 책임진다. 요즘 라이브 공연, 즉흥 연주, 낭독회, 오토픽션(autofiction) 같은 형식이 다시 인기를 얻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일 수 있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 실제로 무언가를 요구할 때 비로소 문학이 될 수 있다. AI는 정교한 문장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의미의 '문학'은 창조할 수 없다. 문학은 결국 한 인간의 시간, 몸, 감정, 책임, 삶의 흔적이 언어로 남은 것이기 때문이다. 즉, 문학은 누군가의 삶을 통과한 언어다. 그 언어에는 상처, 부끄러움, 욕망, 결핍, 기쁨, 애도의 감정이 겹겹이 쌓여있다.
문학은 오래 앓고, 오래 생각하고, 오래 실패하고, 오래 고쳐 쓰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바로 AI가 가장 싫어하는 것—느림, 지연, 망설임—이 문학의 본질이다. 시간의 축적만이 흉내내기 어려운 두터운 질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수험생들에게 ’공부는 머리가 아닌 엉덩이로 한다’고 조언한다. AI 시대의 문학과 예술도 머리는 커질 대로 커진 터라, 그 보다 밑에 위치한 엉덩이의 가치가 더 절실한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AI시대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은 예술(문학)때문에 무엇을 감수했는가?"
이 질문이 유효하는 한, 예술과 문학은 미래에도 여전히 우리 인간의 영역으로 남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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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과 관련된 부분은 거의 핀란드 칼럼니스트의 글을 번역했고 문학과 관련된 부분은 제가 덧붙였습니다.
출처 및 필자 소개
참고 칼럼: 핀란드 일간지 헬싱키사노맛(HS) 기고문, “Tekoälytaide paljastaa vaivan arvon” (AI 예술은 수고의 가치를 드러낸다)
아스타 레파(Asta Leppä): 핀란드의 저명한 사회 비평가이자 언론인, 작가. 현대 사회의 효율성 지상주의와 디지털화가 인간의 실존에 미치는 영향을 날카롭게 분석해 왔다. 저서 《승리자들의 그림자(Voittajien varjot)》, 《고통의 연대기(Sinnikkäät)》 등을 통해 결과 중심의 세상에서 소외된 인간의 '수고'와 '인내'가 가진 숭고한 가치를 역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