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질문이 나무를 향할 때, 신의 대답은 숲을 가로지른다
성경에서 가장 난이도 높은 지혜서는 욥기라고 이야기한다. 나도 욥기를 처음 읽었을 때 끝까지 읽고 나서 고개가 갸우뚱거려졌다. 욥기 대부분은 욥이 엄청난 고난을 받으며 왜 자신이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에 대해 친구들과 하는 열띤 토론, 그리고 욥을 향한 친구들의 간접 혹은 직접적 비난을 담고 있다. 더불어 자신의 생일조차 저주할 만큼 깊어진 욥의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절규가 이어진다.
그러나 고난의 이유를 묻는 욥의 질문에 하나님은 의외의 대답을 하신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욥기 38:4)
“네가 너의 날이 시작된 그날부터 아침에게 명령한 적이 있느냐?”(욥기 38:12)
“네가 하늘의 법칙을 아느냐 그 법칙을 땅에 베풀 수 있겠느냐”(욥기 38:33)
욥도 신기하게 하나님의 이런 '동문서답'같은 대답에 수긍한다. 그 후에 잃었던 것들을 두 배로 되찾는 축복을 다시 누리게 된다. 이런 선문답 같은 욥과 하나님의 대화가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욥기를 몇 번 다시 읽고, 주석서도 보다 보니 조금씩 그 미스터리가 풀려가기 시작했다. 욥이 자신의 고난이라는 작은 점에 집중할 때, 하나님은 그 점을 포함한 거대한 우주의 질서와 주권을 욥에게 보여주다는 것. 욥 또한 고난의 ‘이유’를 아는 것보다, 그 고난 속에서도 여전히 우주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고 계심’을 확인하는 것이 더 본질적인 위로이자 답인 것을 깨닫게 된 것. 하나님은 전능자로서 욥의 질문을 포용하는 더 큰 답을 제시한 것이다.
성경을 보면 욥기 외에도 하나님(예수님)께 묻고 요청하는 내용과 하나님(예수님)의 답이 동문서답처럼 보이는 경우가 몇 군데 더 나온다. 모세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했던 때도 그랬다. 그 배경을 살펴보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 숭배를 한 다. 하나님은 분노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신다. 모세는 이때 간절히 중보 하며 하나님의 동행을 구한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동행의 확신을 얻기 위해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출애굽기 33:18)라고 요청한다. 당장 눈앞에 나타날 찬란한 광채나 구체적인 증거를 원했던 모세에게 하나님은 의외의 답을 주신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출애굽기 34:6)
하나님은 형상을 보여주시는 대신 당신의 ‘이름’과 ‘성품’을 선포하셨다. 모세는 시각적인 기적을 구했지만, 하나님은 신뢰의 근거인 당신의 본질을 답으로 주셨다.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출 3:14에서 이미 밝히신 바)를 다시 확인시켜 주시며, 그 이름이 곧 선하심과 자비라는 성품과 연결됨을 보여주셨다.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을 향한 니고데모의 질문 역시 인간의 틀에 갇혀있는 질문이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3)는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요한복음 3:4)라고 그는 묻는다. 예수님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한복음 3:8)며 영적 차원의 답을 주신다. 니고데모의 질문이 육(肉)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면, 예수님의 대답은 영(靈)적 차원에서의 근원적 변화를 가리킨 것이다.
이렇듯 신과 인간의 대화가 왜 때로는 어긋나 보일까? 그 이유를 한 번 유추해 보자.
첫째, 인간은 보통 ‘무엇을’ 혹은 ‘어떻게’라는 지엽적인 해결책을 묻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문제 해결 외에 우리가 그 문제 위에 있는 주권자를 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상황마다 쉽게 휘둘리지 않는 보다 지속가능한 단단한 믿음을 갖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질문 속에 숨겨진 우상과 한계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종종 1차원적 지식이나 눈에 보이는 현상에 매몰된다. 하나님은 그 질문에 그대로 반사적인 답을 하시기보다 우리가 진짜 마주해야 할 본질적인 과제—영적 거듭남이나 신뢰의 회복—로 우리의 시선을 돌려주신다.
셋째, ‘설명’보다 ‘관계’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식적인 답변은 일시적으로 머리를 채우지만, 존재적인 경험은 삶을 바꿀 수 있다. 하나님은 고난의 원인을 설명해 주는 족집게 강사가 아니라, 우리와 고난의 현장을 함께 통과하는 동행자가 되길 원하신다. 그래서 단편적 설명 대신 당신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하는 방식을 택하신다.
중세 신학의 기초를 놓은 위대한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삼위일체라는 난해한 개념을 이해하려 고심하며 해변을 걷고 있었다. 그때 한 아이가 모래사장에 작은 구멍을 파고 조개껍데기로 바닷물을 길어 담는 것을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무엇을 하느냐고 묻자 아이는 "이 넓은 바다를 저 구멍에 다 담으려 한다"고 대답했다. 그때 아우구스티누스는 ’유레카’의 순간을 경험한다. 아이가 가진 조개껍데기가 유한한 인간의 머리로 무한한 신의 신비를 다 담으려는 자신의 질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떠 만든 하나님과 소통이 허락된 피조물이지만, 신의 거대한 세계를 다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아우구스티누스처럼 겸손히 인정할 필요가 있다. 나무를 묻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숲으로 대답하시곤 한다. 그 숲을 온전히 보게 된다면, 나무 하나가 왜 굽었는지, 왜 시들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하는 기도가 원하는 대답을 못 받는다고 느껴진다면, 욥에게 나타나셨던 전능한 조물주로서의 하나님, 모세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타나 지극히 선하심을 드러내셨던 하나님을 떠올려보자. 우리가 나무 하나를 가리키며 질문할 때, 하나님은 이미 그 나무를 품은 숲 전체로 대답하고 계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