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전)시어머니와 나의 이혼 사유가 같았던 이유

핀란드 아빠들은 정말 ‘라테파파’일까?

by 어나미

핀란드 사람들은 잘 모르는 단어: 라테파파

많은 사람들에게 북유럽은 성평등과 적극적인 아빠상을 떠올리게 한다. 남성의 육아휴직 사용이 활발하고, 아빠가 일상적으로 가사와 돌봄에 참여하는 모습이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중심에는 ‘라테파파(latte pappa)’라는 상징적 이미지가 있다.


유모차를 밀며 카페에서 라테를 마시는 스웨덴 아빠들의 모습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스웨덴에서 처음 만들어진 단어다. 이 단어는 밈처럼 퍼져나가 북유럽 아빠들이 육아에 적극적이라는 인상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스웨덴에서는 실제로 육아하는 아빠가 하나의 문화적 아이콘처럼 받들어진다. 아빠 육아휴직 사용률도 북유럽 1위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의외로 핀란드에서는 아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거의 없다. 우리나라에서 북유럽의 이상적인 아빠상을 연상시키는 이 단어를 거의 누구나 알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는 놀라웠다. 처음으로 이 단어를 들은 것도 핀란드를 방문한 어느 한국인 아빠로부터다. 그가 유모차를 끌고 가는 핀란드 아빠를 보며 ”아 라테파파네!”를 외쳤을 때 나는 처음 그 단어를 들었다. 핀란드인들에게 낯선 이 단어는 사실 핀란드 아빠들의 현실과도 완벽하게 겹쳐지지는 않는다.


핀란드 가정의 불평등한 현실

핀란드의 가정 안으로 들어가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북유럽 라테파파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일상이 펼쳐지는 경우가 많다. 여성은 남성보다 실제로 두 배 이상 많은 시간을 가사와 육아에 쏟고 있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 핀란드인들이 성평등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 현실은 깊은 골이 있다는 것을 통계 수치는 말해주고 있다.


“남편은 도와줄 뿐이고, 모든 걸 관장하는 것은 저입니다”

“남편은 늘 시켜야만 움직여요”

“남편는 아이와 놀아주기만 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다 저의 몫입니다”

“하루 종일 아이와 단둘이서 씨름하고 있어요.”

“내 주위에는 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


핀란드 엄마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불만이다. 이 말들은 핀란드 가정에서 여전히 가시적이지 않은 정신적 노동이 엄마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이의 병원 예약, 유치원 준비물, 생일 파티 준비, 가족 일정 조율, 집안 정리, 식사 계획 등 ‘가정을 운영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거의 다 엄마의 손이다. 반면 아빠의 역할은 주로 야외활동·놀이 중심으로 한정된다. 핀란드 많은 부부도 갈등의 가장 큰 원인으로 가사노동의 불균형을 꼽고 있다.


가사노동의 불균형은 단순히 집안일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정받지 못한 마음, 존중받지 못한 감정, 혼자 짊어진 감정노동의 무게로 다가온다. 반복되는 불균형은 관계의 온도를 서서히 낮추고, 결국 이혼이라는 결정을 향해 사람들을 밀어내기까지 한다. 핀란드는 EU 평균보다 높은 이혼율을 꾸준히 기록해 왔고, 2023년 Eurostat 자료에 따르면 인구 1,000명당 약 2.1건의 이혼으로 EU에서 세 번째로 높은 이혼율을 보였다. 소통 부족, 정서적 지지의 결여, 외도, 정신적 폭력 등 다양한 요인이 얽혀 있지만, 가사 노동의 불균형은 특히 여성들이 이혼을 결심하게 만드는 가장 흔한 이유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대를 이어 반복된 그림자

나의 이혼 사유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은 역시 맞았다. 나보다 한 세대 앞선 핀란드 전 시어머니의 이혼사유도 거의 똑같았다. 신혼 초에 시부모님이 결혼 25년 만에 이혼을 하신 이유가 궁금해서 빙둘러서 물어본 적이 있다. 어머니는 여섯 남매를 낳고 기르는 동안 단 한번도 남편(내 전 시아버지)이 설거지를 해주거나 가사를 도와준 적이 없다고 말해주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단어는 ’단 한 번도’이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던지... 그때는 14년 후에 나도 같은 이유로 이혼을 하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었다. 결혼 전 시아버지를 가까이서 볼 기회가 많지 않았던 나에게 “좋은 신랑감을 고르려면 예비 시아버지를 보라”는 말은 안타깝게도 사후약방문이 되었다.


전남편은 시아버지처럼 알코올중독에 시달리며 평생 실업자는 아니었지만, 집안일을 돕거나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는 지독하리만치 무관심했었다. 자녀가 태어날 때마다 전남편은 꾸준히 출산 휴가를 얻었지만, 그는 ’출산’이라는 단어는 지우고 그 기간을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휴가’로 보냈었다. 아마도 자라면서 가정적인 아버지의 모델을 보지 못해서였을까? 그의 남자 형제들 역시 모두 이혼을 한 번 혹은 두 번씩 경험했다. 가정에서 롤모델은 중요한 것 같다. 아빠 없이 마치 한부모 가정의 가장처럼 아이들을 키웠던 시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아이들은 사랑스러웠지만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내 육아지옥은 번아웃으로 수도없이 나를 몰아갔다.


물론 나의 전남편이 핀란드의 모든 남편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그는 평균적인 핀란드 남편들의 가사나 육아 참여 수준보다 훨씬 밑도는 사람이었다. 이런 불균형은 우리 집이 유독 심한 편이긴 했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비슷한 갈등을 겪는 핀란드 가정이 생각보다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진짜 라테파파를 향한 응원

다행히 최근의 통계수치나 갤럽 설문조사를 보면, 핀란드 남성의 가사 참여가 서서히 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핀란드 정부도 지난 2022년 부모 휴가 제도를 개편하며 아빠의 육아 참여를 제도적으로 강하게 독려하고 있다. 사실 그전까지 아빠 전용 유급 휴가는 엄마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짧았고, 부모가 선택해서 쓸 수 있는 ‘공통 휴가’는 사회적 관성 속에 자연스럽게 엄마의 몫이 되었다. 이제는 부모 모두에게 똑같이 160일의 유급 휴가를 할당한다. 아빠가 자신에게 배정된 휴가를 쓰지 않으면 그 기간은 엄마에게 양도되지 않고 그대로 소멸한다. ‘안 쓰면 손해’라는 강제성을 부여해서라도 아빠들을 육아 현장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이다. 제도가 이토록 강경하게 ‘아빠의 의무’를 명시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그동안 핀란드 사회에서 아빠의 참여가 얼마나 자발적이지 못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스웨덴의 라테파파 문화가 탄탄한 제도 기반 위에서 현실로 잘 자리 잡았다면, 핀란드는 그 사이의 간극이 분명 더 크게 존재해 왔다. 다행히 제도 개편 후, 핀란드 아빠들의 육아 참여 시간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불평등의 틈을 좁혀가며 핀란드 아빠들이 진정한 ‘라테파파’가 되어가는 의미 있는 여정에, 레드카펫이라도 깔아주며 응원하고 싶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핀란드와 일본, 멀지만 '매우' 가까운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