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베트의 만찬, 그리고 언니의 만찬

딸을 기억하는 방식, 한 끼의 진수성찬

by 어나미


유난히 청명했던 지난 10월의 어느 날, 언니 집을 방문했다.


양념 게장, 갈비찜, 육회, 구절판, 각종 나물… 하나만으로도 밥 한 끼 뚝딱 비울 수 있는 일품요리가 식탁에 가득했다. 언니 혼자서 이 음식을 다 만들었다는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상다리 아닌) 식탁 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어느 하나 허투루 만든 음식이 없었다. 하나하나 맛볼 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진수성찬(珍羞盛饌)’란 바로 이런 밥상을 두고 하는 말일 것 같았다. 내가 평생 받아본 최고의 밥상이었다.


영화 <바베트의 만찬>의 마지막 만찬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남편과 아들을 잃고 가난한 어촌 마을로 들어와 시녀로 일하던 바베트. 그녀는 자신이 과거 최고의 요리사였다는 사실을 숨긴 채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날 복권에 당첨되자 그 상금을 오직 마을 사람들을 위한 단 한 번의 식사에 모두 쏟아붓는다. 그렇게 마련된 어마어마한 성찬은 굳어버린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마법처럼 어루만지고 회복시켜 준다.


언니가 이 한 끼 식사를 위해 바베트처럼 가진 돈을 다 쏟아붓지는 않았겠지만, 그날 밥상에는 그에 못지않은 정성과 마음이 담겨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내 앞에 펼쳐진 상이 마치 ‘언니 버전의 바베트의 만찬’처럼 느껴졌다. 겉으로 보기엔 엄마와 내가 식사대접을 받는 '메인게스트'처럼 보였지만, 사실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그 누구도 주인공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유O이는 언니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다. 그날은 정확히 2년 전 유O이가 세상을 등진 날이었다. 어쩌면 세상이 유O이를 등진 날인지도 모른다. 그전까지 나의 음식에 대한 평가가 1차원적으로 혀의 감각에만 의지했다면, 그날 밥상은 혀를 넘어 심금까지 울렸다. 음식이 오감(五感)을 넘어 이렇게 깊숙한 곳까지 흔드는 경험은 처음이다.


’진수성찬(珍羞盛饌)’에서 ’수(羞)’는 여기서는 ’맛있는 음식’을 뜻하지만, 전혀 다른 ‘부끄러울 수’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내 생애 최고의 밥상 앞에서 마냥 즐길 수만은 없었던 이유는, “내가 이런 밥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라는 질문과 부끄러움이 마음 한편에서 떠나지 않아서다.


외국에 산다는 핑계로 언니가 인생 최악의 시간을 보낼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 카톡으로 언제든 무료 통화가 가능한 세상이지만, 어떻게 위로할지 모른다는 비겁한 핑계로 먼저 쉽게 손을 내밀어 주지 못했었다. 유O이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이미 한차례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었다는 것도 나는 몰랐다. 아이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무지했기에 나는 가족 단톡방에 여행 사진을 올리며 신나는 일상을 자랑하기 바빴다.


유O이는 그때마다

”이모, 너무 멋져” ”이모, 너무 맛있어 보여”

그야말로 리액션 부자였다.

”유O아, 우리 나중에 여기 같이 오자”라고 내가 말하면, 언제부터인지 유O이는 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았다. 그 미묘한 차이를 당시에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 내가 지금 언니가 영혼까지 다 부어 만든 밥상을 받아먹고 있다. 그날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유O이도 그 자리에서 함께 밥을 먹었으리라. 밥상은 묘한 묶는 힘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을 같이 먹는 사람인 ’식구’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의 제사 또한 결국 산 자와 죽은 자가 상을 앞에 두고 다시 식구가 되는 예식이다.


멕시코에도 ‘디아 데 무에르토스(Día de Muertos, 망자의 날)’라는 명절이 있다. 14세기 아즈텍 문명부터 시작된 이 전통에 따르면, 죽은 영혼은 1년에 단 한 번 이 날 집으로 돌아온다. 각 가정에는 제단인 ‘오프렌다(Ofrenda)’가 차려지고, 그 위엔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과 물건이 놓인다. 이때 빠지지 않는 것이 설탕으로 만든 해골 ‘칼라베라(Calavera)’다. 이 해골은 공포스러운 모습 대신 화려하게 치장된 채 웃고 있다. 이날은 슬픔을 되새기는 날이 아니라, 죽은 이의 귀환을 축하하는 축제의 날이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치료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남기고, 사랑은 어느 누구도 훔칠 수 없는 추억을 남긴다.” 멕시코의 망자의 날은 죽음의 상처대신, 그들이 남긴 사랑과 추억을 소환한다. 언젠가 유O이 기일에도 아픔보다는 가슴 따뜻했었던 사랑을 더 떠올릴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며칠 전 언니 생일이었다. 간단한 축하 메시지를 보내며 미역국은 먹었냐고 물으니 형부가 직접 차려준 샤부샤부까지 먹었다고 했다. 평생 형부가 그런 근사한 일품요리까지 차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는데. 언니 가정의 조용한 회복도 이렇게 따뜻한 밥상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 이 글은 4년 전에 쓴 글로 언니 가정은 천천히 힐링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한밤의 노래, 오래된 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