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 너머로 나눈 달고 쌉싸름했던 우정의 찬가
"ㅇㅇ아, 노래 좀 불러줘."
갑자기 걸려 온 카톡 전화 너머로 친구 희선이가 다짜고짜 건넨 말이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수십 년을 함께해 온 가장 친한 친구지만, 이런 예고 없는 리퀘스트는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우리가 연애하는 청춘남녀도 아니고, 늙수구레해진 중년의 여성 두 명이 전화로 나누기엔 참 '거시기한' 대화 내용이다. 친구가 내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던 적이 마지막으로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아마 중학생 시절이었던 것 같다.
이 황당한 요구에 처음에는 그냥 웃어넘기려 했지만, 친구는 의외로 강경하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순간, 마음이 갑자기 동하며 노래를 정말로 불러주고 싶어졌다. 사실 전화를 받기 직전, 나는 우연히 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인스타그램 피드를 넘기다 클릭한 지인의 게시물 배경음악이 내가 한 때 너무나 좋아했던 노래 <사랑해요>였다. 이 피드의 게시자는 80년대 중반생으로 알고 있는데, 이 오래된 노래를 알고 배경음악으로 쓸 정도로 좋아한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https://youtu.be/SBTnWMm-TKY?si=6yKCrMyeJSALYsm3
떨어지는 낙엽들 그 사이로 거리를 걸어봐요
지금은 느낄 수 있어요 얼마나 아름다운지
사랑해요 떠나버린 그대를
사랑해요 회색빛 하늘 아래
사랑해요 그대 모습 그리며
사랑해요 아직도 내 마음을
그리움이 쌓여가는 거리를 나 홀로 걷고 있죠
가로등 불빛이 너무도 차갑게 느껴져요.
돌아보면 걸어왔던 발자욱 하나둘 지워질 때
이제야 느낄 수 있어요 얼마나 행복했는지
학교 정문에서 지하철역까지 이어지던 언덕 길이 저녁이 되면 따뜻한 오렌지색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졌다. 가을이 되면 가사처럼 낙엽이 하나둘씩 떨어지던 거리에서 이 노래를 참 많이 흥얼거렸었다. 노래 하나로 갑자기 이런 청춘의 기억의 편린이 마구 떠오르던 그때, 친구로부터 ’ 뜬금없는’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
평상시 같으면 "너 술도 안 마셨는데 웬 노래야?"라고 농담으로 넘겼겠지만, 이날 이 순간만큼은 마치 뭔가에 끌려가 듯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니 거절하기 싫었다. 좀 쑥스러웠지만 그래도 천천히 숨을 고르고, 전화기 너머로 귀 기울이고 있을 친구를 위해 <사랑해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정말로 오랜만에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 부른 노래다.
한 소절이 끝나자마자 친구는 너무 좋다며 아이처럼 기뻐했다. 밤늦은 퇴근길, 갑자기 내 노래가 듣고 싶어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우리는 아주 오래전에도 이런 시간들을 공유했었다. 집에 놀러가 함께 노래 부르며 깔깔대던 중학교 시절. 친구가 피아노 아르바이트를 하던 카페에서 친구 반주에 맞춰 불렀던 우리들 청춘의 노래. 그때의 공기와 선율이 공감각적으로 이렇게 선명히 떠오르는데... 우리는 지금 그곳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와 있는 것인지..
아이들 과외와 카페 아르바이트, 아버지 병구환까지하며 바쁘고 고단하게 대학 시절을 보냈던 그 친구는 다행히 지금은 가정과 일 모두 안정적으로 잘 꾸려나가고 있다. 지금의 나는 그때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곳에 와있지만.
친구는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안전 운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고 나니 그야말로 수십 년 만에 청중을 앞에 두고 노래를 부르게 해 준 친구가 고마워졌다. 그리고 그 청중이 친구여서 더 고마웠다. 한밤중에 거두절미하고 노래부터 해달라고 하고 그 엉뚱한 요구에 겸연쩍지만 서툰 노래라도 불러줄 수 있는 사이. 이건 웬만한 친구 사이가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한밤의 ’해프닝’이기 때문이다.
중국 고전 《열자(列子)》에는 백아와 종자기 이야기가 나온다. 백아가 거문고로 높은 산에 오르고 싶은 마음을 담아 연주하면, 종자기는 그 소리에서 높은 산의 기상을 읽어냈다. 백아가 강물을 떠올리며 연주하면 종자기는 그 소리에서 물결을 정확히 알아봐 주었다. '마음의 소리를 알아주는 친구'라는 뜻의 지음(知音)이 이들 이야기에서 시작됐다. 백아가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어버린 것은 그의 소리를 알아줄 청자(聽者)가 더 이상 세상에 없었기 때문이다.
전화를 끊기 전, 친구에게 말했다.
“인생 뭐 별거 있냐. 우리 이제는 다시 만나면 노래나 많이 부르자!”
내 음(音)을 알아주고 들어주는 친구가 있어서 그래도 이렇게 거문고 줄 안 끊고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