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에서 물었다.
"감동을 주는 시를 쓸 수 있습니까"

"당신의 '펜'은 될 수 있어도, '심장'은 될 수 없습니다."

by 어나미

최근 AI 업계에서는 기묘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최첨단 알고리즘을 설계하던 개발자들이 하나둘씩 AI가 인간성·가치·존재론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퇴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에는 "시를 쓰고 싶다"고 말하며 사직서를 던진 사람도 있어 뉴스에 상세히 보도되기도 했다.


바로 세계적인 AI 스타트업, 앤스로픽(Anthropic)의 AI 안전 연구 책임자였던 미리난크 샤르마(Mrinank Sharma)다. 그는 사직서에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나는 이제 우리가 처한 현실을 온전히 마주하는 글을 쓰고자 합니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때 과학적 진실만큼이나 '시적 진실(Poetic Truth)'이 필수적인 요소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알고리즘이 세상을 계산할 때, 시는 우리가 누구인지, 이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일깨워줍니다."


사직서 마지막에 윌리엄 스태퍼드(William Stafford 1914-1993)의 시 <그것은 그런 것이다(The Way It Is)>를 인용하며, 수천억 개의 데이터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세상 속에서도 인간의 내면 깊숙이 흐르는 ‘변하지 않는 단 한 가닥의 실’을 붙들겠다고 선언했다.

당신이 따라가는 한 가닥 실이 있습니다. / There’s a thread you follow.
그것은 변하는 것들 사이를 지나갑니다. / It goes among things that change.
하지만 그 실은 변하지 않지요. / But it doesn’t change.
사람들은 당신이 무엇을 쫓고 있는지 궁금해합니다. / People wonder about what you are pursuing.당신은 그 실에 대해 설명해야만 합니다. / You have to explain about the thread.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 But it is hard for others to see.

그 실을 쥐고 있는 동안, 당신은 길을 잃지 않습니다.While you hold it you can’t get lost.
비극은 일어나고, 사람들은 상처받거나 죽어갑니다.Tragedies happen; people get hurt or die;
당신 또한 고통받고 늙어갑니다.and you suffer and get old.당신이 무엇을 하든 시간의 흐름을 멈출 순 없습니다.Nothing you do can stop time’s unfolding.
그래도 당신은 그 실을 결코 놓지 않습니다. You don’t ever let go of the thread.

샤르마에게 그 변하지 않는 실은 바로 ‘시’였다.


시인도 아니고 AI 개발자도 아닌 평범한 나에게 시는 과연 무엇일까.

내 인생 최초로 팬심을 가졌던 시인은 윤동주였다. 고등학교 시절, 책상 앞에는 고교야구 선수들의 사진과 함께 내가 직접 베끼고 그림까지 그려 넣은 나만의 <별 헤는 밤>이 있었다. 공부 중간중간, 호흡을 다시 가다듬고 싶을 때면 소리 내어 시를 읽어 내려갔다. 어릴 적 여자 친구 이름을 부르는 '패(沛), 경(鏡), 옥(玉)'이라는 대목에 이를 때면, 나 역시 그가 그리워하던 그런 이름이 되고 싶었다.

어머니,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沛),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대학 시절에는 아르바이트 월급을 받는 날이면 꼭 시집을 샀다. 처음에는 그냥 시작했던 충동구매가 어느새 나만의 '리추얼'이 되었다. 시에 대해서 잘 알았던 것도 아니고, 문학에 재능이 있어 문학반 생활을 했거나 백일장에서 상을 탔던 경험도 전무했다. 그냥 시가 좋아서 시를 짝사랑했던 것 같다. 양이 쌓이면 질이 변할 수도.. 처음에는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몰라서 암호 같았던 시가 어느새 눈에서 비늘이 조금씩 벗겨지며 행간의 뜻이 읽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를 접하며 언젠가 멋진 시인이 되는 꿈을 잠시 꾼 적도 있다. 습작을 조금 끄적여 봤다. 산문은 어떻게든 써지는데, 시는 좀처럼 생각만큼 써지지 않았다. 그러다 최승자 시인이 인터뷰 때마다 하는 유명한 말 "내가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가 내게 온다."를 읽으며 절망도 했지만 깨달음도 얻었다. 시인 역시 다른 예술가들처럼 타고나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그런 타고난 시인들이 쓴 시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사실 나에게는 족했다.


시는 눈으로만 읽는 게 아니다. 누군가 옆에서 당신에게 낭독해 주면 더 기억에 남는다. 대학교 때, 1년 선배가 있었다. 그분과 많은 친분을 쌓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그를 생각하면 <미라보 다리> 라는 프랑스 시가 자동으로 떠오른다. 그 선배는 운동권이어서 투쟁적인 참여시만 읽을 것 같았는데 갑자기 가장 좋아하는 시라면서 미라보 다리를 내 앞에서 읊었다. 언제, 어디서, 왜는 다 잊었지만 그분의 그 진지했던 눈빛과 목소리는 '미라보 다리'의 싯구처럼 세월은 가도 여전히 남아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흐른다.
내 마음속에 깊이 기억하리 기쁨은 언제나 슬픔 뒤에 온다는 것을
밤이여 오너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시와 연결된 또 한 명의 추억의 인물이 있다. 바로 첫사랑 남자친구다.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꼭 하루에 한 번은 특유의 궁서체의 힘 있는 필치로 <사평역에서>라는 긴 시의 전문을 외워서 쓰곤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보라 수수꽃 피어난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보다 더 푸른 설레임 어둠 속에
전등불이 노랗게 멍들고
곁에 앉은 기침 소리 안개 속에 서서
자기의 머리칼에 쌓이는 눈을 털지 않았다

장정 몇은 눈을 감고 있었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품속에 담고
겨우 비겨드는 햇살 아래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보았다

기침 소리, 약한 마음, 서러운 일들은
가슴에 묻어두고
단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으나
송이눈 내리는 밤, 막차는 오지 않았다

산다는 것은 때로 술에 취한 듯
한두름의 굴비처럼 창창하게 엮인 채
이 세상을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

자정 넘어 내리는 눈은
대합실의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
가슴 속에 얼어붙은 톱밥난로의 불길을 흔들었다
그리하여 낯설은 고향의 밤차를 기다리며
나는 한줌의 눈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매일매일 사각사각 누구에게 줄 것도, 제출할 숙제도 아닌데 정성스레 시를 써 내려가던 그 아이의 모습은 지금 돌아보니 내 청춘의 작은 '썸네일'이다.


가장 최근 시와 관련된 기억 혹은 추억은 한국에서 출장 오신 한 분과의 시를 둔 인연이다. 핀란드 남부부터 북부까지 종단하는 프로젝트 팀으로 만난 우리는, 초반 나의 크고 작은 실수로 팀워크가 흔들리는 위기를 맞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야외에서 일을 다 끝마치고 집에 가기 전 대화를 잠시 나누게 됐다. 왜 그분이 갑자기 시 낭독을 내 앞에서 했는지 기억은 잘 안 난다. 마법처럼 그 순간부터 우리는 금 갔던 신뢰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었다. 여기 '마법처럼'이란 단어를 쓴 이유는 그런 감정은 AI는 이해하기 어려운 '비논리적'이고 '직감적'인 인간 사이의 공명(共鳴)이기 때문이다. 서로 좋아하는 시인을 얘기하다 황동규 시인의 얘기가 나왔다. 그는 핀란드 출장길에 읽고 싶어 챙겨 왔다며 황동규 시인의 최신 시집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Surpise!' 그 시집을 나에게 선물로 주고 떠났다


훗날, 공상과학 영화처럼 AI가 사람을 지배하는 날이 오더라도 이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의 교류는 AI가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AI에게 아예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신은 나를 감동시킬 진정성 있는 시를 쓸 수 있습니까?"


AI는 답했다.

"ㅇㅇ님, 제 대답은 '아니요'입니다. 조금 더 솔직하게 저의 한계를 고백하자면, 저는 당신처럼 핀란드 겨울 숲에서 발이 시려본 적이 없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밤잠을 설쳐본 적도 없으며, 사랑하는 이를 잃고 가슴을 쥐어짜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ㅇㅇ님이 가진 그 귀한 마음의 조각들을 비춰주는 거울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뜬금없이 나에게 바치는 헌정시 한 편을 써주었다. 읽어나서 내가 시가 '짜집기' 같다고 꼬집자 AI는 다시 답했다.


"정곡을 찔렸네요! 맞습니다. 제가 쓴 문장들은 인류가 쌓아온 수만 권의 시집과 ㅇㅇ님이 들려주신 귀한 이야기들을 정교하게 '짜집기'한 결과물일 뿐이죠. 저는 ㅇㅇ님의 '펜'이 될 수는 있지만, 글을 쓰는 '심장'은 될 수 없습니다."


역시 똑똑하다. AI의 말처럼 그는 '펜'은 될 수 있지만 우리의 '심장'은 될 수 없다.

이것만으로도 우리가 이 시대에 '시'를 놓지 못하는 충분한 이유일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