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타(Pietà), 케테 콜비츠에서 나의 어머니까지
오늘 인상적인 미술 칼럼을 읽었다. 독일의 판화가인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의 1903년작 판화,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Frau mit totem Kind)’을 소개하는 글이었다. 그녀는 베를린 빈민가에서 소외된 이들을 돌보던 의사 남편 옆에서, 질병과 빈곤 속에 어린 생명들이 속절없이 스러지는 현실을 매일 목격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에 깊이 공감했던 그녀는 당시 일곱 살이었던 아들 페터와 자신을 모델로 이 작품을 완성했다.
하지만 이 판화는 칼럼니스트의 말처럼 그녀의 운명을 예고하는 복선이 되었다. 11년 뒤, 18세가 된 아들 페터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다. 비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장손자 페터(전사한 삼촌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던 큰 아들의 아들)마저 사망한다.
여기까지 읽고 나니 몇 년 전 베를린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한 조각품이 ’ 데자뷔’처럼 떠올랐다. 베를린 중심가 거리를 걷다 나지막한 석조 건물, 노이에 바헤(Neue Wache, 전쟁과 독재 희생자를 위한 중앙 기념관) 안으로 이끌리듯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많이 모여있어서기도 하지만, 전면 입구 너머 텅 빈 홀에 놓인, 죽은 아이를 안고 웅크린 어머니의 조각상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조각의 제목은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Mutter mit totem Sohn)'이었다. 판화의 제목과는 한 단어만 다르다. ’여인’이 ’어머니’로 바뀌어있다.
천장에 뚫린 구멍을 통해 쏟아져 내린 한 줄기 광선이 절망한 어머니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처음에는 그 구멍이 유리로 덮여 있을 것이라 짐작했고, 내가 본 빛 역시 정교하게 설계된 조명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것은 어떠한 가림막도 없는 그냥 구멍이었고, 조명이라 믿었던 빛도 천연광이었다.
다행히 그날은 맑았지만, 비 오는 날은 빗물이, 눈 오는 날은 눈발이 그대로 조각 위로 떨어질 것이다. 어떤 궂은 날씨에도 어머니는 아이의 잡은 손을 절대 놓지 않는다. 검색해 보니 역시나 그 판화 작가와 이 조각품은 같은 작가인 케테 콜비츠의 작품이었다.
이 조각은 원래 이름보다 '콜비츠의 피에타(Kollwitz-Pietà)'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전쟁의 비극을 몸으로 겪어낸 어머니를 묘사한 조각상이, 죽은 예수님을 안고 있는 마리아를 형상화한 ’피에타’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판화로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에 무한히 공감했던 작가는, 직접 아들의 죽음을 경험한 후에는 조각으로 스스로의 고통을 만져나갔다. 아들의 죽은 후 20년이 지난 1937년에야 이 조각품은 완성될 수 있었다. 그녀는 작품이 반전(反戰) 사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히틀러에게 작품 활동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사실 내가 보았던 그 작품은 원본은 아니다. 독일 헬무트 콜 수상의 제안으로, 원본을 확대한 조각품이 1993년 이곳 기념관에 설치된 것이다.
1937년 피에타 완성 후, 그녀는 1940년에 남편을 잃었고 1942년에는 장손마저 전쟁터에서 잃었다. 그리고 1945년 전쟁이 끝나기 바로 직전, 그녀 역시 아픔 많던 이 세상을 떠났다.
콜비츠의 피에타는 오래전 로마 여행 중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 입구에서 보았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떠올리게 해 주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크기가 더 클 거라고 예상했건만 실제로는 아담했다. 죽은 예수님보다 더 젊어 보이는 마리아가 슬픔이 승화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불과 24세에 이 작품을 완성하며 단숨에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이후 노년기에 다시 피에타라는 주제로 돌아갔다. ‘피렌체 피에타’에는 성모와 예수 외에 막달라 마리아와 니고데모가 등장하는데, 니고데모의 얼굴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노년 얼굴이다. 그는 구원의 장면에 자신이 직접 참여하기를 원했던 듯하다. 그의 마지막 유작 또한 ‘론다니니 피에타’다. 독실한 신앙인이기도 했지만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자란 그에게, 헌신적인 어머니의 사랑을 보여주는 피에타는 평생의 갈망이자 예술적 숙제였을지 모른다.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피에타를 곁에 두었던 또 다른 거장이 있다. 바로 고흐다.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모사한 이 피에타 그림 속의 예수님의 머리와 수염은 고흐 자신을 닮은 붉은색이다. 그는 고통받는 예수에게 자신을 투영하며 또 다른 자화상을 그려낸 것이다.
이 작품이 내가 본 다른 피에타 작품과 다른 점은 마리아의 손에 있다. 그녀의 두 손은 예수의 몸에 직접 닿지 못한 채 허공을 가르고 있다. 고흐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누군가로부터 구원의 손길을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손길은 끝내 그의 몸에 닿지 못했다.
그는 거의 유사한 피에타 그림 두 점을 남겼다. 1889년 사망 1년 전에 그린 피에타는 동생 테오에게 보냈고, 1890년에 그린 피에타는 자신처럼 정신병원에 있던 여동생 빌레민에게 주려 했다. 하지만 결국 전해주지 못한 채 자신이 간직하다 세상을 떠났다. 이 두 번째 그림은 훗날 바티칸 미술관에 기증되었다. 결과적으로 바티칸은 위대한 두 예술가, 미켈란젤로와 고흐의 피에타를 조각과 그림으로 모두 보유하게 되었다.
왜 이토록 많은 예술가들이 피에타에 애착을 가졌을까? 왜 우리는 피에타 앞에서 가슴이 마리아처럼 저려오는 걸까?
사실 성경에는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안았다는 구절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가 신앙의 소재로 등장한 것은 13~14세기 흑사병이 창궐하던 독일과 북유럽이 최초였다고 한다. 처참한 죽음이 일상이 된 시대, 사람들은 멀리 있는 신보다 자신의 고통을 온몸으로 이해해 줄 중보자를 필요로 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을 경험한 마리아라면 나의 슬픔을 이해하고 대신 신에게 기도해 줄 것 같았다.
피에타의 어원인 라틴어 ‘피에타스(pietas)’는 단순한 연민이 아니라 , 사랑하기 때문에 끝까지 지키는 충실한 마음과 자비를 뜻한다. 시간이 흐르며 이 단어는 이탈리아어인 ‘피에타(Pietà)’로 변했다. 사람들은 죽은 예수를 안고 못 놓는 마리아에게서 이 지상에서의 사랑의 최고의 형태인 ’피에타’를 본 것이다.
오늘 아침 칼럼을 읽고 나니, 유튜브 알고리즘은 90세 넘은 할머니가 30년 넘게 전신마비인 아들을 돌보는 영상을 추천해 준다. 클릭은 했지만 차마 끝까지 보지는 못했다. 그 속에는 조각상 아닌, 아픈 자식을 품에서 놓지 않고 세상 끝까지 돌보는 살아있는 피에타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 어머니도 그런 의미로 보면 살아있는 피에타다. 80세가 훌쩍 넘으셨음에도 수십 년간 아픈 동생을 돌보고 계신다. 동생이 10대 때 쓰러졌을 때는 어머니가 너무 급한 나머지 등에 들쳐업고 병원까지 달려가신 적도 있다. 그런 장사 같던 힘은 이미 어머니의 몸을 빠져나간 지 오래다. 하지만 자식은 맑은 날만 돌보는 존재가 아니다. 힘이 없어도 돈이 없어도 뻥 뚫린 천장 구멍 아래로 모진 날씨를 다 받아내는 콜비츠의 피에타처럼, 무엇이 닥쳐오더라도 어머니는 아이의 손을 절대 놓지 않을 것이다.
피에타….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은 가장 큰 사랑과 맞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