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복지국가에서 가난의 의미
며칠 전 핀란드 신문에 크게 난 사진이 눈길을 붙들었다. 한 건물을 중심에 두고 돌아서 길게 늘어선 줄. 한때 한국에서 유행했던 명품 상점의 '오픈런'을 연상케 했다. 그런데 기사를 읽어보니 실상은 그와 정반대의 현장이었다. 아침 8시에 문을 여는 헬싱키의 무료 식품 배급소 앞에 새벽 4~5시부터 모여든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핀란드의 3월은 여전히 새벽 공기가 차갑지만, 그들은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몇 시간씩 한 장소에서 서 있었다.
핀란드에서는 이런 줄을 '레이빠요노(Leipäjono, 뜻: 빵 줄)'라 부른다. 식품 회사나 대형 마트에서 유통기한이 임박한 잉여 식품을 기탁받아 줄을 선 사람들에게 차례로 나눠준다. 아침 일찍부터 줄이 길어지는 이유는 준비된 식품보다 줄 서는 사람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조금만 늦어도 기다림이 헛수고로 돌아갈 수 있다.
이 사진이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보도된 것은 이 줄이 길어서도, 오픈런 때문도 아니다. 곧 이 줄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사진에 나오는 헬싱키 최대 규모의 무료 식품 배급소인 물뤼푸로(Myllypuro)구 배급소는 오는 4월 말 폐쇄를 결정했다. 기증되는 식품 양이 무려 80%나 줄었기 때문이다. 경제 불황 탓도 있지만, 더 큰 원인은 역설적이게도 '기술의 진보'와 '환경 캠페인' 때문이다.
AI를 이용한 정교한 재고 관리로 마트의 폐기 식품이 크게 줄었고, 고물가 속에서 유통기한이 가까운 할인 식품을 찾는 소비자가 늘어나며 배급소로 흘러들어오던 잉여 식품이 점차 사라지게 된 것이다. 여기에 식품 쓰레기를 줄이자는 환경 캠페인까지 겹치며 상황이 더 악화됐다. 특히 AI 재고 관리 프로그램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기술의 발전이 ’나비효과’를 일으켜 오히려 사람을 배고프게 만든 셈이다.
현재 헬싱키에는 구(區)마다 시와 NGO에서 운영하는 무료식품배급소가 있다. 이번에 문을 닫는 배급소는 그중 첫 번째일 뿐, 앞으로 더 많은 곳이 도미노처럼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북유럽 복지 국가와 '무료 식품 배급소 앞의 긴 줄'은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이 줄은 지난 30여 년 동안 핀란드 복지 사각지대를 보여주는 가장 가시적인 지표였다.
핀란드에서 이런 무료 식품 배급 줄이 생긴 것은 1990년대 초, 핀란드가 한국의 IMF와 같은 국가 경제 위기를 겪을 때였다. 국가 재정이 바닥나고 복지가 흔들리자 구세군 등 민간단체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당시 해외 매체들은 "복지 국가 핀란드에 왜 이런 줄이 있느냐"며 앞다투어 보도했다. 핀란드 국내에서도 "국가의 수치다", "깨끗한 거리에 얼룩 같은 존재다", "게으름과 중독을 조장한다"는 등 처음에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이런 배급소를 바라봤다.
이런 비난에 당당히 맞선 이가 바로 핀란드에서 '거리의 성자'로 불렸던 베이코 후르스티(Veikko Hursti)다. 그는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평생을 가난한 자를 위해 헌신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누가 뭐라든 "배고픈 사람에게는 죄의 유무를 묻기 전에 빵부터 주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알코올 중독자와 실업자가 가장 많은 헬싱키의 한 빈민가에 배급소를 열었다. 그렇게 신념 있게 밀어붙였던 그의 무료급식 자선 사업은 아들대까지 이어져 계속 운영되고 있다.
초기의 비판적인 시선도 이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이 부자(父子)의 헌신에 경의를 표하는 사람도 많이 늘어났다. "정치가들이 말로만 복지를 외칠 때, 후르스티는 거리에서 직접 사람들을 먹였다. 그가 없었다면 핀란드의 겨울은 훨씬 더 춥고 배고팠을 것이다"라고 한 네티즌은 이렇게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후르스티가 처음 무료 식품 배급을 시작하며 굳이 실외에 줄을 서도록 한 것은, 이런 복지 국가에도 국가가 돌보지 못하는 가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직시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한다. 핀란드 사회가 곁에 이웃이 굶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한 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 길 위에서 줄을 서게 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핀란드 내부에서도 오랫동안 많은 논의가 오갔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내는 나라 중 하나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영하 20도의 날씨에 밖에서 빵을 기다려야 하는가? 이건 정부가 일을 안 하고 있다는 뜻이다"라는 비판도 있었다. 심지어 "줄을 실내로 옮기지 않는 이유는 가난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어 기부금을 더 받으려는 단체들의 전략이 아니냐"는 냉소적인 반응까지 있었다.
실제로 그 줄에 섰던 한 이용자는 "처음 줄에 섰을 때의 수치심을 잊을 수 없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사실 한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은 이런 식품 무료 배급의 방법으로 실외에서 줄 세우기를 가급적 피하고, 요즘은 대안적인 다른 방법( 배달, 예약제 사회적 마켓, 쿠폰제 등)을 선호하는 편이다. 줄 선 사람들에게 비바람과 눈보라의 악천후보다 더 두려운 것은 사람들의 시선이다. 그런 이유로 이용자들의 수치심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 더 많이 모색되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핀란드에서는 여전히 밖에서 줄을 서는 배급 형태가 지난 30년 넘게 크게 바뀌지 않았다. 최근 일부 지역에서는 번호표를 도입하는 등의 변화가 시작되긴 했지만, 실외 배급 줄은 여전히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수치심까지 견디며 지켜온 생존의 줄이 일부 지역에서는 끊기게 된 것이다. 신문 기사에서는 이 사람들의 그 절박한 심정을 이렇게 고스란히 담았다.
- 올해 일흔이 된 연금 생활자 여성은
"내 평생을 성실하게 일하고 세금을 냈는데, 노년에 남은 것이 빵을 받기 위한 새벽의 기다림뿐이라는 사실이 처참하다"고 토로했다.
- 아이에게 줄 우유가 없어 배급소를 찾은 서른 살 싱글맘은
"식료품 가격이 너무 올라 이제는 우유 한 팩 사는 것도 손이 떨린다. 배급소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일 아침 빈손으로 돌아갈 때 아이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정말 막막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 직업이 있음에도 치솟는 물가 탓에 식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된 마흔 살 가장은
"열심히 일하면 평범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핀란드에서 빵 한 덩이조차 못 받는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다"며 한숨 쉬었다.
- 배급을 하는 자원봉사자 역시
"남은 식품이 없다고 말할 때 사람들의 눈에 스치는 절망을 보는 것이 가장 힘들다. 우리는 그저 음식을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지, 사람들을 절벽으로 밀어내는 기계가 되고 싶지 않다"며 같은 심경을 전했다.
사실 올 겨울, 나도 내 생애 처음으로 집 근처에 배급소가 있는지 검색해 봤다. 다행히 그곳까지 가지는 않고 해결이 되기는 했다. 그래서일까? 서민들의 생생한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났다.
내가 핀란드에 이주했던 90년대 말부터 20년간은 핀란드의 화양연화 기간이었다. 노키아라는 회사는 세계 휴대전화 시장을 이끌며 핀란드 경제를 주도했고, 교육, 문화, 정치 모두 세계인들이 부러워하던 모범국이었다. 당시 연금이 적어 어렵게 사시던 (전)시어머니가 국가의 도움으로 새 안경(핀란드에서는 안경이 많이 비싸다)을 맞추고 깨진 유리창을 수리하는 것을 보며, 이 나라가 마치 부모가 아이를 돌보듯 시민을 세심하게 케어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그 시절 한국의 한 방송국의 '핀란드 성공 스토리' 취재를 도우며, 과거의 무료 식품 배급소의 긴 줄을 자료사진으로 찾아드린 적이 있다. 지금은 번영한 나라지만 한때는 이런 시절도 있었다는 대비를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그때도 무료식품배급소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줄이 길지는 않았다.
핀란드에서는 이 줄이 길어지는 것을 경제 위기의 신호로 보곤 했는데, 이제는 줄조차 설 수 없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움이 크다. 그런데 왜 북유럽 복지 국가에서 이렇게 먹는 것까지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을까?
핀란드에는 생계를 이어가는 게 힘들면 신청하는 생계보조금(핀어:toimeentulotuki) 제도가 있다. 그런데 이 제도가 책정한 금액이 몇 년째 물가 상승을 따라가지 못해 비현실적으로 낮다. 또 그 또한 예전보다 훨씬 엄격해진 기준과 절차에 가로막혀 거부되거나 지급이 지연되는 경우가 많다. 당장 오늘 먹을 음식이 없는 이들도 서류 미비라는 이유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 집세 보조금 등 각종 사회 혜택까지 새 정부가 들어서며 대폭 삭감되며, 월세를 내고 나면 식비가 충분히 남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사회적 안전망이 촘촘하다고 믿었던 나라에서, 이제 가난이 개인의 무능이나 게으름만이 아닌 시스템의 균열로 늘어나고 있다. '가난은 나라도 못 구한다'는 우리의 옛 속담이 핀란드에서 맞는 말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 4월 말이면 헬싱키 최대 규모의 이 무료 식품 배급소는 문을 닫는다. 30년 넘게 이어져 온 줄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줄에 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