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부모님 번호를 차단했다

핀란드에서 조용히 번지는 '가족 손절'의 배경

by 어나미

산니가 내린 부모님 '차단' 결정

산니(Sanni)는 헬싱키에 사는 27세 여성이다. 부모님도 같은 도시에 산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 만나지 않고, 전화하지 않으며, 문자도 주고받지 않는다. 산니가 어머니의 번호를 작년 초에 차단했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보면 산니의 어린 시절은 흠잡을 데 없어 보였다. 유복한 가정, 해외여행, 명절마다 웃음이 넘치는 가족사진. 핀란드어로는 이런 삶을 '키일토쿠바엘라마(kiiltokuvaelämä)', 즉 '잡지 화보 같은 삶'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화보 뒤에는 알코올 의존성 아버지와, 사람들 앞에서만 상냥한 어머니가 있었다. 산니가 울면 달래주는 대신 "또 우냐"고 말할 뿐이었다. 가정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부모가 잘못한 일이 있어도 사과를 받아본 적은 없다. 가족 간 문제가 생기면 그저 문을 쾅 닫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다음 날에는 모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아갔다.


산니는 15세부터 섭식장애를 앓기 시작했다. 자신이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는 세계에서, 그나마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먹는 행위였었다. 21세에 테라피 치료를 받기 시작했고, 치료를 받으며 조금씩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와 마주 앉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린 시절이 힘들었노라고, 그 순간들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어머니의 대답은 단호했다.

"네가 잘못 기억하는 거야, 네가 상상하는 거야. 문제는 너에게 있다. 나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산니는 그날 이후 서서히, 그리고 결국에는 완전히 부모와 연락을 끊었다.


이것은 산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핀란드 일간지 『일타 사노맛(Ilta-Sanomat)』이 보도한 이 사연은,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새로운 현상의 단면이다. 바로 '가족 손절'이다. 특히 그 대상이 부모인 경우가 많다.


"그래도 부모인데" — 흔들리는 상식

한때 '가족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말이 도덕이자 상식이었다. 부모가 어떤 사람이든, 관계가 얼마나 고통스럽든 혈연은 끊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지금, 그 상식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


2025년 유거브(YouGov)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38%가 현재 가족 중 최소 한 명과 연락이 끊긴 상태라고 한다. 가족·커플 테라피스트 캐서린 카발로(Katherine Cavallo)는 영국 『가디언(The Guardian)』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상담실에서도 가족 단절을 경험하는 내담자가 꾸준히 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변화를 가속화한 결정적 요소로 꼽히는 것은 테라피 문화와 소셜 미디어의 확산이다. '나르시시스트 부모', '독성 가족', '가스라이팅' 같은 개념들이 SNS를 통해 광범위하게 퍼지며, 이전 세대라면 그냥 참고 살았을 경험들이 이제는 뚜렷한 이름을 갖게 됐다. 이름이 생긴 고통은 이야기될 수 있고, 이야기된 고통은 다른 선택지를 낳을 수도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조슈아 콜먼(Joshua Coleman)은 저서 『Rules of Estrangement (단절의 규칙)』에서 이런 흐름을 세대적 가치관의 변화로 분석하고 있다.

이전 세대는 가족에 대한 의무감이 강해 관계에 독성이 있더라도 쉽게 끊지 못했었다. 그러나 요즘 젊은 세대는 어떤 관계든 무조건 유지하는 것보다 건강한 관계를 선택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오래된 규범에서, 개인의 행복과 정신건강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가족 손절 문화에 대해 사회의 반응은 엇갈린다. 부모를 끊은 자녀를 이기적이거나 배은망덕하다고 보는 시선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다. 핀란드의 심리치료사 로타 헤이스카넨(Lotta Heiskanen)은 『일타 사노맛』과의 인터뷰에서 "연락을 끊는 것은 최후의 수단이며 매우 고통스러운 결정이지만, 관계에서 정신적 혹은 신체적 폭력이 있었고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면 필요한 선택일 수 있다"고 말했다. 산니 역시 담담하게 말한다. "물에 빠져 죽을 것만큼 힘들어야만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가족 손절’이 비교적 쉬운 핀란드의 사회 구조

핀란드는 여러 해 동안 세계 행복 지수 1위를 차지해 온 나라다. 복지, 교육, 의료, 청정 자연. 외부에서는 이상적인 사회로 바라본다. 하지만 그 행복한 나라에서 가족과의 단절은 적지 않게 벌어진다. 핀란드에는 이 현상을 특히 가능하게 만드는 문화적·제도적 토양이 존재한다.


핀란드 사회에서는 개인주의가 매우 중시된다. 개인의 자유는 법률 안에 강하게 내재되어 있으며, 젊은이들은 독립하여 자신만의 삶을 꾸리도록 장려된다. 학생 지원금은 부모의 소득과 무관하게 개인에게 지급되며, 의료보험, 사회복지, 주거 지원 등 모든 제도가 개인 단위로 설계되어 있다.


핀란드 저널리스트 아누 파르타넨(Anu Partanen)은 그의 저서 『The Nordic Theory of Everything (모든 것에 대한 북유럽 이론)』에서 이 구조에 대해 이런 설명을 한다.

"북유럽 복지국가의 목표는 개인을 가족 내의 모든 형태의 의존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 자유의 목적은 모든 인간관계가 의무나 필요가 아닌 순수한 사랑으로만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핀란드에서 부모와의 관계는 경제적 종속이나 생존의 필요와 분리되어 있다. 대학을 다니는 데 부모 돈이 필요하지 않고, 아플 때 부모의 도움이 필수적이지 않으며, 살 곳도 나라에서 주는 보조금으로 구할 수 있다. 관계가 고통스럽다면 그것을 유지해야 할 외부적인 이유가 없다.


이에 더해, 핀란드 정부는 2025년 5월부터 23세 이하 국민에게 한 달 안에 정신건강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치료 보장제를 도입했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 젊은이가 늘어나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을 돌아보는 사람도 늘어난다. 산니도 그중 한 명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한국 사회에서 ’가족 손절’ 혹은 '부모 손절'은 여전히 무거운 금기다. '효(孝)'라는 단어는 오랜 세월 한국 사회의 도덕적 기둥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부모와의 단절이 공식 비공식적으로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경제적 독립 구조가 서구와 다르기 때문이다.


대학 등록금, 취업 준비 기간, 주거 비용 등 많은 면에서 자녀가 부모에게 의존하는 구조가 핀란드보다 훨씬 강하다. 관계를 끊고 싶어도 끊기 어려운 현실적인 이유들이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의 변화가 있음을 최근 발표된 설문조가 말해주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26년 발표한 제20차 한국복지패널 조사(7,300 가구 대상)에 따르면, "부모를 모실 책임이 전적으로 자녀에게 있다"는 의견에 동의한 비율이 20.63%에 그쳤다. 반면 반대 의견은 47.59%로, 찬성보다 두 배 이상 높았다. 2007년 첫 조사 당시에는 부모 부양이 자녀 책임이라는 응답이 52.6%로 과반이 넘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지난 20년 사이에 한국인의 부모 부양 의식이 많이 바뀐 것이다. 서로 간의 경제적 독립이 이루어지는 만큼, 감정적 독립도 서서히 따라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절이 가져오는 것 — 고통과 자유, 그 사이 어딘가

부모와의 단절을 선택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 결정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산니는 연락을 끊은 뒤 "충격, 분노, 슬픔, 그리고 마침내 수용"이라는 애도의 단계를 겪었다고 말한다. 부모를 잃은 슬픔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부모’를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잃은 슬픔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더 복잡하고, 어쩌면 더 깊은 상실일지 모른다.


그녀는 지금도 그리워한다. "자신의 부모님이 그리운 게 아니라, '부모님'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립다"고. 나를 안아주고 있고, 기댈 수 있는 어른이 그리운 것이다.


산니는 지금 사랑하는 파트너와 삶을 공유하고 있다. 그는 건강하고 따뜻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녀는 "그에게서 사랑이 무엇인지 배우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혈연이 아니어도 진정한 돌봄의 관계는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를 통해 배웠다.


이제 그녀에게는 꿈이 생겼다. "평생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고, 세상의 큰일들로부터 숨을 수 있는 그런 집"을 만드는 것이다.


부모와의 단절은 가족을 버리는 행위가 아닐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 오히려 그것은, 비로소 진정한 가족을 만들기 위한 첫 번째 걸음일 수도 있다. 혈연이 아닌 선택으로, 의무가 아닌 사랑으로 이루어진 가족말이다. 핀란드어로 '코티(koti)'는 '집'이라는 의미이지만, 그보다 더 깊은 뜻도 가지고 있다.


‘코티(koti)’는 ‘자신이 온전히 자기 자신일 수 있는 곳’을 가리킨다.

산니가 꿈꾸는 것은 아마 바로 그런 ’코티’일 것이다.


p.s. 이 글은 최대한 제 의견이나 감정은 빼고 그냥 패트(기사와 자료 나열)로 연결해서 썼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주제에 대해서는 가능한 가치 중립적 태도를 유지하려합니다.


<출처>

- Helena Heiskanen, *Ilta-Sanomat*, 2025 — 산니(Sanni) 인터뷰 원문 기사

- YouGov, *Family Estrangement Survey*, 2025

- Joshua Coleman, *Rules of Estrangement (단절의 규칙)*, Harmony Books, 2021

- Anu Partanen, *The Nordic Theory of Everything (모든 것의 북유럽 이론)*, HarperCollins, 2016

- Katherine Cavallo, *The Guardian* 인터뷰, 2025

-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제20차 한국복지패널 조사 결과 발표, 2026

- 핀란드 사회보건부 (Sosiaali- ja terveysministeriö), *Lasten ja nuorten terapiatakuu (아동·청소년 치료 보장제)* — 공식 시행 발표, 1.5.2025, stm.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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